블로그 인터뷰

벨기에에서 태어난 ‘전주사람’ 배영근 신부와 앰네스티를 돌아보다

“신부님,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아 보이는 거 아세요?”

“간사님은 몇년도에 태어나셨죠?”

“82년도요…”

“간사님보다 한국에 더 오래살아서 그런거예요(웃음)”

 

젊은 시절 배영근 신부의 모습 ⓒPrivate

젊은 시절 배영근 신부의 모습 ⓒPrivate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넨슨이 <옵저버>지에 ‘잊혀진 수인들’이라는 제목으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받는 포르투갈 대학생들의 탄원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던 1961년, 이름도 생소한 백이의(白耳義, 벨기에의 한자어)에서 온 배영근(Joseph Feyen) 신부는 한반도에 첫 발을 내디뎠다. 59년 사제품을 받고,당시로서는 6.25전쟁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한국으로 오기 위해 영국에 건너가 한국어과를 수료했다.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서슬퍼런 독재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던 때, 배영근 신부는 어떻게 앰네스티 한국지부와 인연이 닿게 되었을까.

“벨기에에서 태어나 세계2차대전을 경험했는데 그 때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전쟁으로 어느 가정이나 할 것 없이 인권유린의 피해를 입었고,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거든요. 그 경험이 한국에서도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됐어요.”

벨기에에서 가족과 함께,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배영근 신부 ⓒPrivate

벨기에에서 가족과 함께,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배영근 신부 ⓒPrivate

2차 대전을 몸소 경험했던 배 신부는 예외없이 일어나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전시의 고향의 모습과 교묘히 겹쳐보였을 것이다. 비상계엄, 유신헌법 강행 등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70년대 그는 이유도 모른채 구속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앰네스티의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75년 3월부터 8월까지 회비를 납부한 영수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부터 회원이었고, 지금까지도 연을 이어왔네요.”라고 배 신부는 회고했다.

1970년대 국제앰네스티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 속에서 국내에서만 99명(추정치)의 양심수를 위한 탄원활동과 함께 고문 철폐, 사형 폐지, 수감자 처우 개선 등의 활동을 벌였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했을리가 없다. 배영근 신부는 고향을 방문하면서 한국지부로부터 중요한 요청을 받게 된다.

“1978년에 고향 벨기에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당시 전무이사였던 윤현 목사의 부탁으로 유럽에 있는 앰네스티 15개 지부에 재정지원을 요청했고,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지부에서 지원을 받아서 전달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주그룹 사람들과 모임 ⓒPrivate

전주그룹 사람들과 모임 ⓒPrivate

그 당시 앰네스티는 각 지역마다 결연그룹(Adoption Group)을 결성했다. 전북에서는 72년부터 33년동안 배영근 신부가 몸담았던 전주교구를 중심으로 ‘전주그룹’의 활동이 펼쳐졌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은 후 앰네스티 회원들 대부분이 계엄령 하에 구속 또는 수배됐습니다. 지부 활동도 어려웠고, 그룹활동을 하는 것조차 위험이 커서 한동안 앰네스티 활동을 중단했었어요. 그러다가 허창수 신부님으로부터 전주그룹을 다시 설립하여 같이 활동해보자는 요청을 받아 1984년 12월 8일 회원 11명을 모아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인권상황을 심히 우려했던 배영근 신부이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미션’은 선교였다. 62년 12월 고창성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70년까지 7년간 주민과 동고동락하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또한 1970년부터 2년간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뒤 공주사대와 전북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아담한 키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배 신부는 다정다감한 선생님이었으며, 그의 밑에서 수학한 학생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은 신부의 인품에 반해 제발로 성당을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제자들이 두고간 꽃바구니와 편지가 늘 배 신부의 곁을 지키고 있다.

 

전주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배영근 신부, 왼쪽 두 번째는 같은 전주교구에서 활동한 문정현 신부의 모습 ⓒPrivate

전주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배영근 신부, 왼쪽 두 번째는 같은 전주교구에서 활동한 문정현 신부의 모습 ⓒPrivate

배영근 신부에게 특히 더 기억에 남는 양심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잘 했던 일, 남을 도왔던 일은 다 기억할 필요가 없어 잊어버렸어요. 대신 잘못했던 일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일은 늘 상기하면서 나중에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요.”

노(老)신부에게 50년전 기억을 꺼내어 잘한 일 잘못한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결례를 저질렀지만, 인터뷰 내내 온화한 말투로 성심껏 답변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앰네스티 회원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에서 놓친 것도 있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당시 우리는 참 꾸준히 활동했고, 그 자체로 의미있고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함께 하고 계신 분들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길 바라며 무궁한 발전과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이제는 전주 말이 더 편해진 배영근 신부 ⓒAmnesty International Korea

이제는 전주 말이 더 편해진 배영근 신부 ⓒAmnesty Internationa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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