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국제앰네스티 44년 인권운동사를 돌아보면, 직접 조명을 받진 않았지만, 그곳에 늘 함께했던 ‘성실한’ 회원 한은수가 있었습니다. 1992년 정기총회에 처음 참석한 이후 지금까지 회원으로서, 부이사장으로서 25년을 앰네스티와 함께하신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1984년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고, 영국과 중국이 홍콩 반환 협정에 조인했으며, 유엔에서는 고문방지협약을 채택했다. 서울 주요 대학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한은수는 선배를 따라 윤현 앰네스티 이사장님을 만나 앰네스티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그는 앰네스티 활동이 시시해보여서 별다른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앰네스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90년대 학교와 사회의 분위기는 80년대와는 많이 달랐다. 졸업할 때쯤인 1991년, 그간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앰네스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앰네스티 활동이 ‘힘 안 들이고, 위험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앰네스티 활동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면 무엇일까.
처음 갔던 1992년 총회에서 도시락 시켜먹었던 게 기억나고, 당시 지부장을 뽑아야 하는데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회의가 길어졌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그때는 아시아 태평양 그룹미팅(APGM)이 2년에 한 번씩 있었다. 1994년에는 한국에서 개최했는데, 한국지부 사무국에 직원이 2명 있던 시절이라 회원들이 고군분투를 많이 했다. 빔프로젝터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사무국 재정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다니던 회사 총무부장님을 조르고 꾀어서 OHP를 빌려서 행사를 치렀다. APGM 마지막 날이 ‘양심수의 밤’이었는데 그때 김광석 씨가 와서 공연했었다.

‘양심수의 밤’에 특별공연으로 와주신 김광석님. 강산에, 안치환, 여행스케치도 같은 무대에 섰다.
98년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피에르 사네 사무총장 시절에 한국에서 2001년도 국제대의원총회(ICM)를 유치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실제로 국제사무국에서 두 분이 실사를 오셔서 제가 일주일 동안 아침 7시에 의왕 집에서 나와서 저녁까지 운전하고 다니면서 롯데호텔이고 인터콘호텔이고 심지어 제가 다니던 기업의 연수원까지 보여드렸다. 다른 회원 한 분도 통역으로 같이 다니셨다. 사무국이 대구에 있는 데다가 직원도 몇 명 없어서 수도권에 있는 회원들이 이것저것 다 했던 것 같다.
“옛날얘기 많이 하면 꼰대라던데…”
2001년 강원도 원주, 대구, 서울 등 전국 8개 지역에서 16개 앰네스티 그룹이 같은 날 동시에 고문방지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신문에도 났다. 또 후원금을 모으려고 회원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도 팔고, 티셔츠도 팔았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팔았다. 이렇게 몇 년을 하고 나니 사람들이 요즘은 티셔츠 안 파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한번은 사무국에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 있는 한 학생이 앰네스티 활동에 관심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기에 저랑 다른 회원 한 분이 그 학생을 만나러 학교까지 찾아갔다. 그 학생은 변호사가 되었고 3년 전쯤 앰네스티 행사에서 만나서 반가웠다. 또 한 회원이 대구 사무국에 에어컨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흔쾌히 에어컨을 사주기도 했다. 돈이 있더라도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은데, 그때는 그랬다.
앰네스티 활동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들간의 어울림이 있었고, 좋은 사람들, 특이한 사람들, 삶이 훌륭한 사람들을 그룹활동과 이사회를 하면서 많이 만났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아쉽다.

2016년 정기총회에서 당선된 한은수 이사장 ⓒAmnesty International
“일단 한 번 용기 내서 와보세요.”
지금도 분명 회원 중에서 후원금 이상으로 뭔가 하고 싶은 회원들이 있을 테다. 본인이 직접 그런 시간을 지나오셨는데, 그런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일단 한 번 용기 내서 와보세요”라고 하고 싶다. 총회를 오든, 캠페인을 오든, 운영모임을 오든 한 번만 오면 거기서 끈이 생길 수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고, 훨씬 더 재밌다. 문제는 시작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다. 한 번 한 거랑 열 번 한 거는 별 차이 없을 수 있는데, 한 번 한 거랑 한 번도 안 해본 거랑은 다르다.
물론 용기 내서 왔지만, 우리한테 실망하고 갈 수도 있다. 그 뒤는 우리, 기존 회원들의 몫이다.
대학 축제 때 운동장에서 대동제를 하는데, 지나가면서 보면 ‘저 먼지 구덩이에서 왜 저런 걸 하고 있지?’ 라고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게 된다. 근데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서 해보면 굉장히 다르다. 그렇기에 “함께 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25년간 앰네스티와 함께하면서 앰네스티 활동이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을까.
상식적인 선에서 인권들을 생각해왔다. 하나하나 깊이 있는 내용은 앰네스티를 통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아마 요즘 화두인 여성에 관한 문제는 지금도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50대 아저씨치고는 나은 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겪는 인권 문제를 조금 더 신경 쓰고, 조심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사는데 앰네스티가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평범하게 직장생활 하며 살았으면 지금이랑은 다르지 않았을까.
부이사장을 4번 하셨고, 23기 이사회 이사장이 되셨다. 이사회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이사들이 직접 나서서 일하기가 어렵다. 출근길에 사무처장님이랑 통화하더라도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동안 아침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사무처에서 앰네스티와 인권을 생각하면서 종일 일하시는 분들이랑 생업을 하면서 활동하는 우리가 같은 수준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인권에 대한 문서, 자료 많이 보고 고민하는 것보다 이사회 모임에 빠짐없이 나오고, 회의 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회가 해야 하는 일은 의사결정을 잘 내리고 그 결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내외부적인 위기상황에서 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와 이사회가 흔들리지 않고 잘 굴러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 중 하나이다.
한은수 이사장님은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뜬금없이 “앰네스티란 이름 자체가 이쁘다. 카페를 하나 만들고 앰네스티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라며, 다음번엔 이런 인터뷰 말고 그냥 앰네스티에 대해서 수다를 떨기로 하고 자리를 마무리지었습니다.
거창하고 화려한 수식보다는 단단하고 소박한 한은수 이사장님과 23기 이사회의 앞으로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