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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기획] 특별한 변화, 앰네스티 50년의 역사 ①

2011년 국제앰네스티 50주년을 맞으며, 지난 50년의 역사를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특별한 변화”특집기사로 연재한다.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앰네스티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이 행동들이 모여 특별한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앰네스티 50년 역사였다. 1961년 창립 이후부터 1981년 까지 20년의 역사 속에서 앰네스티가 만들어낸 특별한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특집기사를 통해 지난 50년 동안 국제앰네스티의 역사와 인권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1961년 5월 28일, 영국 옵저버(The Obserber)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한 주의 어느 때라도 신문을 펼쳐 보라. 그러면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그 나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이유로 구금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되고 있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 독자들은 진저리 쳐지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만약 전 세계에 걸친 이 진저리 쳐지는 무력감들이 하나의 행동으로 모아진다면 보다 효과적인 그 무엇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 했다는 이유로 두 명의 학생이 7년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네슨(Peter Benenson)이 분노하여 작성한 ‘잊혀진 수인들(The Forgotten Prisoners)’이라는 기사의 첫 부분이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50년 동안 무력감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변화로 가는 인권의 새로운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무관심하고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이러한 분노를 행동으로 모아서 변화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피터 베네슨이 상상했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으로 만들어 불의라는 높은 벽을 무너뜨려왔던 것이다.

<런던에 처음 문을 연 국제앰네스티 사무실(왼쪽), 국제앰네스티 20주년 행사에서 피터 베넨슨 창립자가 촛불을 켜고 있다(오른쪽)>

양심수를 위한 ‘희망음모’의 촛불을 밝히다(1961~1971년)
1961년 앰네스티는 정부에 반대하면 누구든 가두어 둘 수 있고 정부가 저지른 범죄는 처벌 받지 않는다는 당시 인식에 도전장을 내민다. 역사의 폭넓은 맥락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흉악한 일을 꾸미는 음모가 가득 찼다면 앰네스티는 인권의 이름으로 양심수를 위한 ‘희망음모’의 촛불을 밝혔다. 이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로 부당함에 맞서면서 냉전체제에서 억압 받던 수 천명의 양심수들을 위해 강력한 저항연대를 결성한 것이다.
앰네스티 첫 10년 동안, 피터 베넨슨 개인으로 시작된 앰네스티 활동이 소규모의 자원활동가 그룹에서 27개가 넘는 국가에 18개의 지부와 850개의 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앰네스티 활동이 시작되면서 ‘양심수(Prioner of conscience)’라는 말은 곧바로 국제통용어가 되었고 이 운동의 상징으로 대표 되었다. 또한 철조망에 둘러싸인 촛불은 전세계적으로 희망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앰네스티의 효시인 ‘사면을 위한 탄원활동(Appeal for Amnesty) 1961’이 시작된 직후인 7월 첫 번째 국제회의가 열린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등 7개국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표현과 종교의 자유 옹호를 위한 지속적인 국제운동’수립을 결정하고 지리적·정치적 배경이 상이한 3명의 정치수를 선정하는 세 가지 네트워크(Threes Network)라는 원칙도 결정한다. 이처럼 앰네스티는 초창기부터 그룹활동의 불편부당성을 견지하고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활동원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앰네스티의 첫 번째 상징물인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초는 그 해 12월‘백 만인의 무고한 사람들을 위한 청원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밝혀졌다.

 

<1983년 양심수를 위한 탄원을 유엔에 전달(왼쪽), 국제앰네스티의 세계인권선언 약속에 서명하고 있는 티벳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오른쪽)>

 

다음해인 1962년부터 앰네스티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월 가나를 시작으로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양심수인 요제프배란(Josef Beran) 대주교의 사면을 위해 활동했고 그 후 포르투갈, 동독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재판을 참관했다. 넬슨 만델라는 재판 후에 국제앰네스티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그가 준 도움뿐 아니라 그가 재판정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격려받고 고무되었다.”
그 해 7월 벨기에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모든 그룹들이 만장일치로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라는 영구적 조직수립을 결의한다. 그리고 1963년 런던에 국제사무국을 설립하고 각 국가들의 정치적 수감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 자원활동가들로 구성된 조사연구팀을 설립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권보고서가 탄생하게 된 토대의 시작이었다. 앰네스티는 포르투갈, 루마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감 환경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를 발간하고 파라과이, 로디지아(현 잠비아와 짐바브웨), 동독의 보고서도 발간했다.
이러한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대해 국제사회는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보고서의 해당 국가 중에 하나인 동독의 언론은 국제앰네스티의 활동을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포르투갈 보고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동독에는 정치수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인권침해를 찾고 있다면 서독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앰네스티는 권력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인권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앰네스티는 세계인권선언 제18조와 제19조를 중심으로 양심수와 정치수에 대한 활동에 집중했다. 그래서 1965년부터 매달 수인들을 위해 편지를 보내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1968부터는 ‘양심수 주간’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과 활동이 만들어낸 첫 10년의 변화와 성과는 분명했다. 1961년 이래로 10년 동안 4,000명의 수감자에 대해 활동했고, 2,000명이 풀려났다. 그 결과 앰네스티는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어 1964년 유엔, 1965년에 유럽의회로부터 자문지위를 부여 받고, 1969년에는 유네스코의 자문지위를 부여 받았다.

 

<국제앰네스티의 세계인권선언 약속에 서명하고 있는 영국의 가수 로비 윌리엄스, 1977년 국제앰네스티 노벨평화상 수상, 인권에 열렬한 지지자였던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국제앰네스티에 헌정한 작품 (왼쪽부터 차례대로)>

 

고문철폐와 사형제도 폐지의 촛불을 밝히다(1972~1981년)
앰네스티의 두 번째 십 년은 세계적인 고문철폐캠페인과 함께 시작한다. 앰네스티의 대표적인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형제도 폐지 캠페인은 사형에 관한 스톡홀름선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위급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중단시키기 위한 긴급구명활동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1970년대 앰네스티는 규모와 영향력에서 급격한 성장이 있었던 시기였다. 1981년 말까지 150개가 넘는 국가에서 25만 명이 넘는 회원과 지지자가 존재하는 단체로 성장한다. 이 시기는 앰네스티 운동의 성과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981년까지 39개 국에 지부가 생기고 2,200개의 그룹이 조직되었다.
1961년 이후 10년간의 인권활동을 통해 앰네스티는 소련에서부터 브라질까지 고문이 일상적인 사실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1972년부터 전세계적 고문반대캠페인을 시작한다. 1973년 파리에서 고문폐지를 위한 세계회의를 주최하면서 고문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고문의 정도에 대한 국제적 지형도를 보여줄 뿐 아니라 “고문은 실질적으로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몇몇 정부는 성별, 나이 혹은 병력에 상관없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시민들을 고문하는 것을 관습적으로 조장하고 있고 점점 많은 수의 국가가 이를 용인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세계에 전달해 파장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국가들의 보고서도 발표하게 된다. 1974년 칠레 쿠테타 이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정치적 탄압과 처형, 고문을 폭로하는 보고서, 1975년 그리스 고문에 대한 보고서, 국제적인 고문현황에 대한 업데이트 된 두 번째 ‘고문보고서’를 발표한다. 1976년 한해 동안에는 지부와 그룹들이 우루과이의 고문에 대해 전세계적인 고문반대 국제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1973년 고문에 관한 첫 번째 UN결의안(결의안 3059호)이 채택되었고, 1975년에는 유엔총회에서 고문이나 기타 잔혹한,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고문반대선언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할리웃 배우 리차드 기어가 국제앰네스티의 세계인권선언 약속에 서명하고 있다>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 1989년 미국지부가 제작한 사형제도반대 포스터>

1973년 신속하고 효과적인 캠페인 활동인 ‘긴급구명활동(Urgent Action, UA)’을 시작한다. 이는 처형이 임박 했거나 정치적 살해의 위험에 처한 사람,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는 사람, 불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치적 수인, 체포된 양심수 등 위급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중단시키고 인권침해 희생자들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캠페인 기법이었다.
1973년 3월 19일, 최초의 긴급구명활동이 발의되었고, 대상은 정치적 이유로 구금된 양심수인 루이즈 바실리오 로시(Luiz Basilio Rossi)교수였다. 전 세계에서 그를 위한 석방요구 탄원편지들이 쏟아졌고 그 해 12월 그는 석방되었다. 지난 ‘긴급구명활동’의 역사를 볼 때 각국 정부는 국가 평판에 신경을 쓰고, 국제사회의 여론과 평가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급구명활동’은 국제적 여론과 압력을 통해 지난 50년 동안 해당정부와 인권침해상황을 변화시켜 왔다.
한편, 결사의 자유를 행사하다가 수감된 16개국 167명의 노동조합원들을 위한 캠페인이 1976년 11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캠페인의 결과로 석방된 도미니카 공화국의 노동조합 대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앰네스티 활동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는 어느 지하 독방에 발가벗겨진 채 갇혀 있었습니다. 처음 200통의 편지가 오자 간수들이 옷을 돌려주었습니다. 200통이 더 오자 교도소 관리인들이 나를 보러 왔습니다. 편지가 무더기로 더 오자 그 교도소 책임자가 상사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편지는 계속 왔습니다. 3,000통이 되자 교토소 소장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습니다. 소장은 내게 자신이 받은 편지들이 담긴 커다란 상자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 같은 노동조합의 대표에게 세계 전역에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1978년 국제앰네스티, 유엔 인권상 수상>

1977년 스톡홀름에서 사형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는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스톡홀름 선언이 만들어 졌다. 이 후 사형폐지는 전 세계적인 추세와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지구상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한 국가는 단지 3개 국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세기를 훌쩍 넘긴 2011년 현재, 사형제도를 법률적으로 폐지했거나 실질적으로 폐지한 국가는 139개에 이르고 있다. 2010년 한해 동안 사형을 집행한 국가의 수는 불과 23개에 불과하다.
두 번째 십 년의 활동을 통해 앰네스티의 주특기는 세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1980년 소련 일간지 이즈베스찌아(Izvestia)는 “국제앰네스티가 제국주의의 비밀 활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뿐 아니라 “앰네스티는 ……세계 백여 개국 이상을 상대로 공갈협박을 해왔다(대통령, 우간다)”, “…… 공산주의 선전의 도구 …… (주지사, 호주 퀸즈랜드)”, “…… 친소 노선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단체……(과테말라 정부)”, “…… 욕구불만의 노파들과 청소년 모임……(검찰총장, 케냐)”과 같은 권력자들의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인권과 진실은 권력자들을 항상 불편하게 한다. 이것은 어쩌면 인권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앰네스티 활동의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자들의 비난과는 달리 국제사회로부터 앰네스티의 성과는 인정을 받게 된다. 1977년 노벨위원회는 “모욕적인 처우, 폭력과 고문에 항거하여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활동을 통해 앰네스티는 자유와 정의의 기초, 더 나아가 세계 평화의 기초를 확보하는 데에 이바지 했다”며 앰네스티에 노벨평화상을, 이듬해인 1978년에는 유엔으로부터 유엔인권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국제적으로 신뢰 높은 단체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앰네스티의 영향력 또한 확대되었다.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소식지 2011년 001호 <표지이야기>코너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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