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진씨는 평화적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하여 2011년 3월에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서울남부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12년 7월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모든 이들을 양심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문명진씨를 비롯해 약 800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옥중서신
병역거부권, 0.75평 너머의 연대
문명진(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스코틀랜드 외딴 섬에서 일하는 우체부이자 앰네스티 회원인 분의 편지를 받았다. 그의 편지가 지구반대편에 있는 내 손에 닿기까지 거쳤을 여정을 떠올려봤다.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만 우리는 서로 가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기운 잃지 말라고 격려해주는 문장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달쯤 전부터 앰네스티 회원들의 편지를 계속 받고 있다. 한동안 독일 지부 회원들의 편지가 오더니 요 며칠은 영국 회원들의 편지를 많이 받았다. 뉴질랜드, 스위스, 스웨덴에서 온 편지도 있었다. 너를 지지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를 비롯한 한국 병역거부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들이 많다.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이며 위로를 건네는 편지들을 보면서 내 마음에선 뭉클 고마움이 샘솟는다.
자기 주소를 적어 준 이들에겐 답장을 썼다. 그랬더니 자기 편지가 정말로 내게 전해질 줄은 기대하지 못했다면서 다시 내게 답장을 해준 독일 분이 있다. 냉전 국면이 한창이던 1960년에 이미 대체복무를 시행한 나라에서 태어난 덕에 자기는 군대 대신 청소년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나의 ‘진짜’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출소한 뒤에 그 주소로 자기 동네 맥주와 와인, 소시지를 보내준단다. 막상 출소 후 난 어디서 무얼 하며 살지, 여느 청년실업 세대들처럼 안정된 주소지 없이 월셋방 전전하며 살 생각을 하면 막막하긴 하지만 이 독일 청년이 보여준 호의 덕에 징역살이로 팍팍하게 찌든 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공교롭게도 뉘른베르크. 상사의 명령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음을 판시하면서 나치 부역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전범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영국에서 날아온 편지들에선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착된 영국 병역거부권의 산 역사를 실감했다. 다른 유럽 근대국가들과 달리 영국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야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1차 대전 중에 이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였다. 물론 여느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영국의 병역거부자를 역시 초창기에는 비겁자, 비애국자란 비난을 들었다고 한다.
1차 대전 때 평화주의자이자 병역거부자로 수감됐던 자기 할아버지 이야기를 적어준 편지, 2차 대전 때 병역 대신 대체복무를 한 자기 아버지 얘기를 적어준 편지를 받아보았다. 자신이 병역거부자였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3년간 군산에서 퀘이커 평화구호팀으로 활동을 했다는 한 할아버지의 편지도 받았다. 소녀 시절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언급하며 나의 병역거부를 지지한다고 적어준, 올해 일흔 두 살이라는 할머니의 편지를 읽었을 땐 그 잔잔한 울림이 더 오래 남았다. 이 편지들에 고마우면서도 문득 한편으론 한국에서 전쟁을 겪은 당사자들이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왜 듣기 힘든 것인지,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하는 생각들이 자라났다.
위에서 언급한 편지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칼질로 봉투 오른 면이 개봉된 채로 내게 전달됐다는 것이다. 검열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는 ‘감시와 통제, 규율권력’이 일상화된 감옥이다. 슬픈 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이런 감시와 통제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젠 걸을 때 교도관의 지시와 계호가 있어야만 내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칼질로 개봉된 편지를 받으면서도 무덤덤해진 내 모습이 보인다. 이런 걸 두고 감시의 내면화 혹은 자발적 검열이라고 하는 걸까.
며칠 전 꿈에선 교도소 안을 교도관의 동행 없이 혼자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곳에서 징벌 사유가 되는 ‘무단 독보’를 한 것이다. 이게 내 무의식 속 자유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 꿈이라면 좋으련만, 꿈에서 나는 어딜 움직이든 CCTV의 감시 아래 놓여있었다. 교도관의 보안카드와 비밀번호가 있어야 열리는 쇠창살 문을 나는 자동문 지나가듯 통과했다. 중앙 통제실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보고 있다가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심지어 꿈에서 난 그런 통제실의 ‘호의’에 감사하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도 했다. 잠에서 깬 뒤 꿈을 다시 떠올리고 있으려니 무력감과 허탈함, 서글픔의 감정들이 몰려왔다.
요즘처럼 햇살 좋은 봄 날 오후, 나는 문득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다. ‘혼자’ 마음껏 발 가는 대로 걸어보고도 싶다. 나중에 출소하면 탁 트인 넓은 곳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내 몸에 벤 감옥 때를 조금씩 벗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선, 1평 남짓한 이 독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따스한 봄 햇살을 기억하며 나도 다른 평화수감자들에게 격려와 위로, 지지의 편지를 써 보낼 것이다. 이 순간에도 차마 총을 들 수 없는 자신의 양심을 두고 고뇌하고 있는 청년들이 더 이상 감옥에 오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편집자 주 )
국제앰네스티는 개인의 양심이나 종교 혹은 신념에 반한 강제 복무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된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종교나 신념 혹은 신앙에 근거해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병역을 강제하는 일은 ‘종교와 신앙을 표현할 권리’를 부당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http://bit.ly/PQH83p)에 대한 더 자세한 입장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국제앰네스티 법률의견서 (http://amnesty.presscat.kr/campaign_library/4199/)를 참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