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
내가 느낀 라오스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평온하고 심심했으며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미국 <뉴욕타임즈>에서는 라오스를 죽기 전 꼭 가보아야 할 여행지 1위로 선정하였다. ‘어머니 강’이라고도 불리는 메콩 강이 국토 대부분을 지나며 풍족한 천연자원을 가진 라오스는 아직 최빈 개도국(LDCs) 중 하나이다.
소승불교를 기반으로 한 불교문화권에 속한 나라답게 아름다운 사원들이 곳곳에 존재하며, 특히 북쪽에 위치한 ‘루앙 프라방’은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순수한 사람들이 가득한 고요하고 평온한 이 나라는 아직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 후반 라오스 북부 산악지대는 미국과 적대 관계였던 베트남군의 전쟁물자 이동 경로로 사용됐다. 이른바 ‘호치민 통로(Trail)’라고 불리던 수송로를 차단하려 미 공군은 이 지역을 따라 엄청난 양의 공중폭격을 감행했다.
1964년에서 1973년 동안 라오스 국토를 향한 폭격은 총 58만 번이 넘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8분마다 한 번씩 폭격이 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껏 알려진 폭격 임무의 대부분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기에 그 누구도 폭격 임무의 횟수와 묻혀있는 폭발물의 양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9년간 치러진 비밀 전쟁(Secret War)은 라오스 국토의 대부분을 폭격으로 오염시켰다.
전쟁은 끝났지만, 폭격 피해자들을 위한 별다른 지원은 없었다. 깊숙이 묻혀있는 폭탄들의 제거는 물론이고 재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는 라오스 정부의 역량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폭격을 했던 미국 정부에서도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국제원조기구와 여러 나라 정부의 재정과 기술지원을 바탕으로 재건사업이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불발병기(UXO: Unexploded Ordnance) 제거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비정부기구들도 생겨났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코프 라오스(COPE LAOS)도 비슷한 성향을 지닌 단체이다. 마침 본부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행 일정에 센터 방문을 포함시켰다.
국제 NGO 또는 일본과 호주 정부로부터 사업지원금을 받아 운영되는 이 센터는 UXO-확산탄, 지뢰, 불발탄 등을 모두 포함한다 –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어 장애인이 된 이들을 위한 재활치료 시설과 UXO의 위험성을 알리고 이를 제거하는 활동을 이어나가는 코프 센터(COPE CENTER)가 나란히 있어 전 세계 곳곳에서 오는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센터 입구로 향하던 발걸음은 녹슨 쇠로 만들어진 조각품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총 500kg 이 넘는 폭탄들의 잔해로 만들어진 조각품은 폭발물로 생명을 잃거나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곧바로 기념품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티셔츠는 물론이고 열쇠고리와 엽서, 작은 인형들을 판매하는데 이렇게 얻은 수익금은 센터 운영비와 재활치료비에 사용된다고 한다. 다른 문을 하나 더 넘어서면 이제 본격적으로 UXO에 관한 전시가 시작된다. 운이 좋게도 그룹 방문객들을 위한 설명에 동참 할 수 있었다.
비밀 전쟁에서 투하된 폭발물 대부분은 확산탄이다. 마치 씨앗이 뿌려지듯 조그마한 폭탄들이 넓은 지역에 두루 투하되는 이 폭탄은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한 깊이와 위치를 알 수 없는 채로 묻혀 있어 많은 라오스인들의 손과 발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커다란 장애물로 자리 잡고 있다. 설명 뒤에는 UXO 사고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리는 영상이 이어졌다. 피해자의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특히나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확산탄의 독특한 모양에 이끌려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 폭발하는 경우 또는 밭이나 길에서 땅을 파거나 뛰어다니다 미처 발견되지 못한 불발병기를 건드려 폭발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UXO 제거를 위해 미국 정부가 제공한 미 공군의 작전상황지도를 살펴보면 베트남 국경과 가까운 라오스 국토의 오른편은 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의미의 붉은색 점들로 가득 덮여있다. ⓒ Private
코프 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11년까지 대략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UXO 사고로 인해 팔 또는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였다. 현재는 매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일한 사고를 당한다고 한다.
어른들의 경우는 숲을 개간하거나 농사를 짓다 또는 들판에 널린 고철을 수거하다 사고를 당한다.(고철 대부분은 폭발물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이다) 아직 UXO의 위험성에 대한 이해도가 적은 주민들은 그들의 집 혹은 밭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폭발물 잔해를 밥그릇이나 농기구 등의 생활기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코프와 비슷한 성격이지만 주로 UXO 제거를 중점적인 목표를 두고 활동 중인 ‘UXO 라오스’는 주민들의 경각심을 높이고 폭발물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코프와 라오스 정부가 힘을 모아 피해자들을 위한 재활 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나무 의족과 의수를 만들어 이들의 재활을 도왔고 현재는 좀 더 가볍고 튼튼한 재료들로 의족과 의수가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센터에서는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을 돕기 위해 재활 치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센터 한편에는 국제연합(UN) 관련 기구들과 여러 나라의 원조기구들이 발간한 연구자료들이 모아져 있었다. 그곳엔 지난 2010년 발효된 ‘확산탄 금지협약’ 비준국가 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은 아직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들어 인명피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무기들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협약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4년이 흘렀지만, 한국은 여전히 확산탄 금지협약에 비준하지 않은 국가로 남아있다.
방명록에는 갖가지 언어로 위로와 응원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한국어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니 코프 센터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관심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더운 날씨에 목을 축일 겸 센터에서 운영하는 카페 의자에 앉았다. 진하고 달콤한 라오스 커피를 마시며 직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말로는 이곳의 운영비는 호주 정부를 비롯해 일본, 노르웨이, Halo Trust, Handicap International처럼 국가와 비정부기구로부터 지원받는다고 하였다. 이 단체들은 UXO의 제거를 위한 재정적, 기술적, 인력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가까운 미래에 한국을 통한 지원을 기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년 어림잡아 100명이 넘는 라오스인들이 UXO 관련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다. 희생자들을 줄이기 위해 UXO 제거 장비 구매와, 제거 전문가 교육, 라오스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있는 센터 운영비에 쓰이는 예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기엔 라오스 정부의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한 이유로 예산의 대부분이 국제기구나 여러 정부의 지원으로 충당된다. 어느 누구도 라오스의 UXO가 모두 제거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이미 몇 십 년 전에 멈추었지만 그 땅에 남아있는 라오스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따듯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이 가득한 이 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UXO가 묻혀있다. 지금도 중동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확산탄이 사용 중이다. 또 다른 라오스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코프 방문센터(COPE VISITOR CENTER)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있다. 이 단체를 더 자세히 알거나 센터 활동에 후원하고 싶다면 아래의 홈페이지를 찾아 Donation 부분을 확인하면 된다. 센터는 여행자거리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20분 정도 아니면 뚝뚝(라오스의 택시)을 타고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