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첫째주 수요일 저녁, 작은 영화관 필름포럼 과 함께 <앰네스티 수요극장>이 회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 동안 책이나 강의로 인권을 ‘공부’ 해 오셨다면, 극장에 앉아 영화 속에 숨겨진 인권의 이야기를 직접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앰네스티 수요극장>의 두번째 영화 지미스홀 Jimmy’s Hall 에 대한 최한별 회원의 리뷰를 소개합니다.
*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70년 전 아일랜드의 역사가 반복되는 오늘의 대한민국
<지미스 홀>을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대체 뭘 쓰지?’ 였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 앰네스티 수요극장에서 <프랭크>를 보고 나서도 똑같이 들었다. 그러나 <프랭크>가 주는 막막함이 내가 아는 인권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당황스러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면 <지미스 홀>은 오히려 내가 흔히 ‘인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주제들로만 그득 채워진 영화였기 때문에 대체 이 많은 구슬을 어떻게 꿸 것인가, 하는 막막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지미스 홀>을 본 사람이라면 지미와 친구들이 겪는 일들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으리라. 시민, 사회, 정치적 권리인 집회, 시위의 자유나 신체의 자유부터 사회, 경제적 권리인 주거권과 재산권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인권침해 문제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그 이야기들을 잘 풀어 나갈 재간이 없기에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역사를 통해 자꾸만 반복되는지, 그리고 또다시 반복된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나름 고민한 바를 나누고자 한다.
춤과 책을 가르치는게 뭐가 나쁘냐고? 그건 발 끝에서 머리까지 사람들을 주무르려는 속셈이야”
셰리던 신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굉장히 재미있다고 느꼈던 부분은 다시 연 마을 회관에서 열린 첫 파티와 일요일 미사에서 이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의 부덕한 죄악을 통렬히 비판하던 신부님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혼자 숨죽여 웃느라 민망했다. 제 옆에 앉으셨던 분,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려요..) 전반적으로 따뜻한 색감인 주황-왁자지껄한 사운드가 담긴 파티장면과, 차가운 푸른 빛- 셰리던 신부의 화난 목소리만 차가운 교회 건물 안에서 울리는 미사 장면의 대비가 재미있었고, 다음으로는 “어둠의 아프리카 땅에서 건너와 탐욕에 불을 붙이는” 재즈 음악에 맞춰 “동이 트도록 춤을 추는 것”이 얼마 큰 죄악인지에 관해 셰리던 신부가 과장되게 설교하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이 장면부터 셰리던 신부로 대표되는 권력자들과 지미로 대표되는 평범한 사람들 두 집단은 서로 다른 특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사회 안정을 빌미로 자행되는 권력자들의 폭력
권력자들은 시종일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상상된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고, 이러한 걱정은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사회 혼란과 범죄를 예방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고귀한 명분이다. 그들은 마을회관에서 ‘언젠가’ 일어나게 될 공산주의자 양성을 걱정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마을회관에서 공산주의 강의를 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문 기사에서 그런 전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민들이 모여 함께 나누는 즐거움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죄의 열매’인 쾌락이다. 전부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딱히 뭐가 잘못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온해 ‘보이니까’ 죄일 것이다. 아니, 죄다. 이들은 동네 사람들이 억울하게 땅이나 집을 빼앗긴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한 마을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서류를 전달하여 대신 맞서게 한다. 자신들의 손에는 결코 흙도, 피도 묻히지 않는다.
반면 지미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필요가 생길 때 행동한다. 배움에 대한 필요, 인생의 순간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가 먼저 존재하고, 모두가 직접 나서 스스로의 손과 발로 그 필요를 채운다. 여기에 두 세 단계 앞서는 계산은 없다. 이렇게 탄생한 소박한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은 빵으로만 채울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장미를 피워낸다. 그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거나 다른 이(즉, 부자들) 것을 빼앗고자 하는 유인에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분노를 표출하고 힘을 모았던 때는 자신의 손으로 평생 일궈온 땅을, 일곱 식구가 추위와 비를 피할 초가집을 빼앗기고 나서였다. 대체 마을 회관을 다시 연 속셈이 무엇이냐고 다그치는 신부에게 지미는 말한다.
“나는 학자가 아니에요. 나는 군인이었고, 뱃사람이었고, 부두노동자, 광부였고 바다에서도 지하에서도 일했어요. 나는 많은 것을 보았고 실수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이런 결함들이 있다고 해도 나는 나의 이웃들과 친구들, 나와 같은 사람들을 믿어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모이고 인생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들이죠”
(“I’m no scholar. I’ve been a soldier, a sailor, a docker, a miner, on the seas and underground. I’ve seen much and made many a mistake, but despite all our flaws, I believe in my neighbour, my fellow man, my class. Meeting up and struggling to understand our lives as best we can.”)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
켄 로치 감독이 그동안 왜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상상의 산물인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협’이 두려워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일을 예방하고자 지금 행복의 싹을 자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의 양식을 위해 제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 인생에 직접 뛰어들어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춤추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호흡과 움직임을 영화라는 예술로 남기고자 한다. 이러한 존경은 지미를 통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 셰리던 신부의 입을 통해 고백된다.
“(추방되어 떠나는 지미를 둘러싸고 야유하는 사람들에게) 그만들 해요, 당신들을 모두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용기 있고 위대한 사람이에요.”
인권이란, 내가 원할 때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
늘 새로이 깨닫지만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빵을 구할 수 있는 것, 내가 원할 때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내가 인간으로서 충분한 권리를 누리게 되면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상상하고 나의 행위에 낙인을 찍어 무력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나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물론 그 행동을 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더욱 더.
나는 그 동안 앰네스티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건을 접하고, 많은 탄원 편지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작아 보이는 나의 행동이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함께할 때 생명을 살리거니 누군가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그리고 언젠가 내가 ‘지미’가 되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나를 따라와 줄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행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주저 말고 앰네스티와 함께해 주시길. 더디지만 마음 벅찬 변화들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가다 보면 이 변화에 서명보다 조금 더 많은 지분율(!)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도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