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국제앰네스티에서 발행한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강제노동 관련 보고서 「고통을 수확하다」가 가을과 함께 찾아왔지요. 고용허가제라는 절차상의 불친절함과 방관 그리고 고용주들의 간사함은, 그동안 신문 기사로 접한 이주노동자의 삶 너머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할지 가히 짐작하기에도 벅차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무색하게도 언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해, 가을과 함께 열린 ‘혐오에 대한 특별 기획 강좌’의 첫 강의가 인종차별과 소수자 인권이라는 소식에 빚진 마음으로 찾았습니다.
“인종,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이나 폭력을 선동하는 발언은 금지되어야 한다.”
강의는 유엔자유권규약 제20조와 함께 서문을 열었습니다. ‘인종, 국적, 종교’에 따른 차별과 적의, 폭력을 금지하는 내용이지만, 사실상 소수자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방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혐오표현 규제 관련한 내용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더욱 실제적인 해법이 될 수 있겠지요.
“차이를 보여주는 것만 골라서 측정하자”
소수자 연구를 해 오신 박경태 교수님은 ‘인종주의’라는 키워드로 수업을 진행해주셨습니다. 먼저 ‘인종’이란 생물학적, 유전학적, 신체적 특징에 따라 구분된 인간이라는 사전적 정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자의적인 권력관계의 기준으로 특정한 신체적 특징을 선택하고 강조해 온 ‘인종’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집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인종주의’란 근대 이후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차별을 합리화 한 사상입니다. 차별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과학은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다른 점을 찾았던 것이지요.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사람들이 학살인 줄 몰랐다며 파편화 된 핑계를 대거나, 기독교인들이 노예를 인간이 아닌 부류로 규정해 교리의 충돌을 극복하고 차별을 정당화 한 것은 모두 인종주의의 나쁜 역사입니다.
지난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67회 에미상 시상식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은 흑인 여배우로는 최초로 비올라 데이비스(Viola Davis)입니다.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앤디 샘버그(Andy Samberg)는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인종주의는 끝났다. 할리우드, 네가 마침내 해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인 청년들이 대낮에 백인 경찰의 실수로 총을 맞아 사망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진짜 흑인’ 논란으로 모욕적인 의문을 받고 있지요. 교묘하고 새로운 형태의 신인종주의는 계속해서 사회의 갈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어의 장벽으로 출발선부터 뒤처진 다문화가정 아동들, 인종과 출신국에 따라 차별받는 100만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중할 것인지,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존엄한 존재가 되는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인간은 포유류 중 가장 동질적인 ‘종(種)’이고, 혼혈과 이주를 통해 번식해왔다”는 교수님의 친절한 설명이 유독 서글펐던 이유를 되돌아봤습니다. 단순히 모든 사람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자연히 존엄하고, 하늘과 신에 의해 권리가 주어졌다는 정당성을 웅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권은 지난 역사와 사회적인 희생으로 쟁취한 산물이고,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고양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에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소수자가 존중받는 사회야말로 모두의 인권을 위한 사회임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