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졸업 시험들을 쳤구요, 기말고사를 치르거나 과제를 하면서 굉장히 바쁘게 보냈어요.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국회 앞 농성에도 참여하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지냈습니다.
저는 사실 모임을 하거나 이런 만남을 가지게 될 때 항상 무서움이 있거든요. ‘그 안에서 트러블이 생기면 어떡하지?’, ‘내가 뭘 잘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요. 첫 모임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내가 여기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하는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모임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딱 들어가자마자 ‘아, 여기서는 기분 좋게 있다가 가자. 할 수 있는 한 즐겁고 편안하게 임하자.’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 모임이 되길 바라기도 했고요. 마음가짐을 바꾸니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편하게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남겼어요.
네, 맞아요. 잘 보이려고 제 모습을 꾸며내거나, 이 모임에 저를 끼워 맞추려고 억지로 ‘척’하는 것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요. 인위적으로 어떤 척하지 않고, 내가 기분 좋고 편하게 있어도 되는 모임이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세상이랑 단절된 상태로 자아를 탐구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고민 시간이 길어지니 탈진이 오듯, 다 지치고 더 이상 고민하기도 싫은 상태가 왔어요. 하고 있던 것도 다 놓게 되고, 그때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낸 시기가 있어요.
그런데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만들어낼 때 그 쾌감이 있더라고요. 그게 글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영상일 수도 있고, 오프라인 행사나 캠페인일 수도 있고, 광고일 수도 있는데, 어떤 것이든 그런 걸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길게 고민하고, 또 여러 일들을 경험했던 시간들을 통해서요.
저는 제 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그걸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는 게 좋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지식 등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하고, 타인들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거요. 그런데 그걸 못하게 되면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고요.
어떤 제작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즘은 제가 자체적으로 컨텐츠를 제작해서 완결하고, 플랫폼에 연재해보고 싶어서 거기에 집중하려고 해요.
개인의 역사가 다 사실은 그 사람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컨텐츠잖아요. 저의 경우에도 제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으니, 이 중에 제가 당장 구현할 수 있는 컨텐츠가 무엇일지 여러 생각을 해봤어요.
예전에 국토종주를 했었거든요. 도망치는 마음 반 몰라서 용감한 마음 반으로 임진강에서 해남의 땅끝탑까지 혼자서 카카오맵을 켜고 걸었어요. 그 과정을 전부 카메라로 찍었어서, 그걸 다듬어서 글과 영상으로 연재해보고 싶어요.
네, 23일? 21일? 그 정도 걸었던 것 같아요.
사실 출발할 때는 엄청난 생각이 있지 않았어요. 갑자기 트러블이 생기거나 일이 꼬이는 등 사람과의 관계나 저의 일상에서 제가 계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저는 강박증이나 편집증 같은 게 너무 심해져서 힘들었거든요. 풀 냄새를 맡고 싶은데 주변에 마땅한 곳이 없어서, ‘아, 나 어디 가서 풀 냄새 맡고 싶다’라는 마음 하나로 떠났어요.
아, 그런데 생각보다 바다 쪽으로 많이 가서… (웃음)
네, 해소되었어요. 제가 한창 상담을 받을 때, 거기 선생님께서 저에게 자꾸 어디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본인에게 집중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었어요. 그때 저는 그게 되게 뜬구름 잡는 얘기 같고, 무슨 사이비 종교처럼 느껴졌었거든요. 그렇게 이해가 안 갔었던 말인데, 그 여행 후에는 그게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항상 불안해했는데, 그 뒤로는 불안함이 많이 해소되었어요.
음, 사실 국토종주를 하는 와중에도 제가 명예욕에 빠져서 ‘아, 이거 유튜브로 찍어서 올리면 대박나겠다.’ 이런 생각을 엄청 했어요. 그래서 첫 날부터 계속 카메라로 찍으면서 걸었거든요. 그런데 한 3-4일쯤 되니까 정말 막막한 거예요. 이걸 계속 찍긴 찍는데 뭘 찍어야 될지도 모르겠고,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요.
그런 게 제 고질적인 문제였나 봐요. 항상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고, 지금 내 모습보다는 내가 원하는 이상향이 나라고 생각을 하는 거요. 그 날도 카메라를 들고 가고 있었는데, 걷다 보니까 어느 순간 기시감이 들더라구요. 계속 저는 ‘화면 안에 있는 제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정말 갑자기 ‘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저’로 포커스가 옮겨가는 거예요.
저는 그때 발견한 느낌이었어요. ‘아, 이게 사람들이 얘기하는 자아 정체성 그런 거구나.’ 하고요. 국토종주를 하면서 그런 순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항상 생각하게 된 거구요.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떤 일에 대한 걱정을 하거나 불안해해도, 어쨌거나 지금 나는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그때 많이 느꼈어요.
저는 원래부터 활동가는 아니였고, 대학교를 다니다 휴학을 하면서 앞서 말씀드린 여러 고민과 자아탐구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커밍아웃과 아웃팅 등 여러가지 힘든 일련의 시간들을 거치고 났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진짜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이제 진짜 전부 다 그만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많이 안 좋은 상황으로까지 치달은 적도 있어요. 그런 와중에 겨우 찾아낸 게 성소수자 모임이나 단체에 가서 제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요. 활동가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건 아니었고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정의당이 지난 총선 결과가 안 좋아서, 혁신 위원회를 만들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자리가 제가 사는 지역에서도 열린다고요.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원내정당은 거기밖에 없었어요. 차별금지법을 당론으로 채택할 정도였는데 선거가 잘 안 됐으니까, 혹시 사람들이 정치공학적으로 선거 이야기만 하다가 정말 중요한 실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빼먹고 가버릴까 봐 겁이 났어요.
그래서 찾아갔죠. 엄청 긴장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있다. 지역에도 있다. 나같은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걸 기대한다.’라고 벌벌 떨면서 얘기하다가 울었죠. 그 이후로 거기 계시던 상근자분이 종종 성소수자 인권 관련 활동들을 권유해주셨어요. 그렇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항상 답답하거나 화가 나는 기사나 뉴스를 보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막막했거든요.
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물론 내 일이 더 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내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무슨 마음을 가졌었는지 항상 생각하거든요. 내가 그때 왜 시작했고, 지금은 어떻고, 내가 무슨 마음으로 지금 이 활동을 하러 가는지 이런 것들이요. 이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 안 할 이유가 없다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네, 군대 전역 후 거리에서 앰네스티 거리모금 활동가분을 만났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을 만났던 게 제가 젠더나 인권 쪽으로 방향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던 계기예요.
그때가 16년, 페미니즘 리부트가 딱 시작될 때쯤이었어요. 저는 처음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접해서 너무 혼란스러웠을 때고요. ‘이게 다 나쁜 사상이고, 지나다니는 여성들이 다 이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라며 혼자 공포에 빠져 있었죠.
그런데 그 거리모금 활동가분께서 논란의 중심이 되는 ‘페미니즘’을 거리 한가운데에서 너무 멋있고 용기 있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분이 너무 멋있었어요. 에너지 있고, 밝고, 긍정적이고, 힘 있어 보였어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마지막에 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 팔찌를 나눠 주시는데, 그 팔찌를 끼면서부터 확실히 마음이 굳었어요. ‘이거 나쁜 게 아니구나, 내가 좀 더 알아봐야겠다.’라고요. 그 뒤로 공부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니, 페미니즘이 사실은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는 거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요. 그때의 일이 지금까지도 나비효과처럼 제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껴져요.
어릴 때는 그랬어요. 한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이게 사실은 내 문제였는데 내가 회피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인권 운동을 하고 활동하는 게 늘 너무 즐겁고 재밌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당장 내 문제니까요. 그분이 그걸 다시 상기시켜 주신 것 같아요.
첫 번째 테마는 당장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풀 수 없으니까, 그런 노래가 필요해서 제안했어요. 저는 캔라클 활동 중 자두님께서 ‘갑분싸’라고 말씀해주신 게 가장 마음에 담는 단어거든요. 보통 혐오 발화나 인권을 침해하는 상황을 목격했을 때, 그걸 문제 제기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잖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갑분싸’가 조마조마한 단어였거든요. 그런데 자두님이 그걸 역으로 뒤집으셔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게 아니라 갑자기 분노를 싸지르고 싶은 거라고 표현해주셔서 정말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반인권적인 언행을 문제시하는 저희가 분위기를 망친다고 지적받을 게 아니라, 실은 그 언행을 행사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해주셔서요. 속이 참 시원했어요.
두 번째 테마는 요즘에는 고양감이 고취되는 순간이 필요한 때가 있더라구요.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나 자신감이 필요할 때요. 그런 순간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캔라클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제안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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