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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지는 것들: 여성 청소년의 강인함, 주체성, 그리고 성적 욕망

<너의 권리를 주장해> 릴레이 서평 시리즈 (2)
김도현 |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활동가
청소년들이 마주하는 각종 차별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위티’의 활동가 김도현 님

청소년들이 마주하는 각종 차별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위티’의 활동가 김도현 님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룬 기사에 으레 실리는 일러스트가 있다. 어린 여자아이가 어두컴컴한 방 한 가운데서 고개를 수그린 채 울고 있거나, 가해자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있는 그림이다. 하나같이 약하고 순진하고 무력해 보이는 그 초상은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관련 기사에 주로 실리는 일러스트 예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관련 기사에 주로 실리는 일러스트 예시

실제로 성폭력을 경험한 내 친구들, 동료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그들은 다양한 모양과 결의 고통을 겪었으나 결코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모습처럼 납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상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돌보고 도움을 요청했으며, 말과 글로 진실을 증언했다.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비슷한 이유로 고립된 사람을 향해 연대의 손을 뻗기도 했다.

그들은 어른들의 구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저마다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생존자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2019년에 시작된 스쿨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며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수많은 이름 없는 청소년들이 목소리를 내고 힘을 보탰기 때문이었다.

‘지켜주어야 할 피해자’를 넘어서

위티 창립의 기점이 된 스쿨미투 집회

위티 창립의 기점이 된 스쿨미투 집회

내가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스쿨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그런 만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청소년들이 ‘지켜주어야 할 피해자’가 아니라 ‘변화를 만드는 주체’로 대우받는 곳이다.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비(非)청소년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우리 사회에서, 여성 청소년의 삶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여성 청소년이 직접 말할 기회는 아주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가려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성적 욕망이 그렇다.

필자 본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위티 창립총회

필자 본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위티 창립총회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일명 ‘N번방’ 사건의 피해 여성 중 상당수는 청소년이었다. 이들은 트위터에서 자신의 노출 사진 등을 올리는 ‘일탈계’를 운영했고, 가해자들은 이 계정을 해킹해 개인정보를 가족이나 친구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며 피해자들의 성을 착취했다. 이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은 가해자들의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피해자들이 왜 대체 ‘일탈계’를 운영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단 반응이었다. ‘성적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음지에서 그런 계정을 운영하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애초에 여성 청소년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성적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했는지 되묻고 싶다. 당장 나만 해도, 금기인 성(性)에 대해 잘 알면 문란하고 이상한 애가 될까 봐, 또 아예 모르면 지루하고 매력 없는 애가 될까 봐 두려워하며 나 자신을 검열해 온 시간이 길다. 여성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잣대가 얼마나 엄격한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일탈계’라는 음지 문화의 존재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위티의 논평 속 한 구절을 빌려오자면, “성을 욕망하는 여성 청소년에게는 익명성을 빌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만이, 그러니까 ‘일탈’만이 허락되었던 것이다.”[1]

성과 건강한 관계에 대한 토론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성과 재생산에 대한 정보 전달 실패가 여러분을 더욱 취약하게 만듭니다.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할 때 보호 장치가 부족한 것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너의 권리를 주장해> p. 111

<너의 권리를 주장해> 속 이 대목은 ‘N번방’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다. 성을 ‘19금’으로 규정하는 문화는 청소년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취약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는 것.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으로부터의 격리가 아니다. 청소년들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성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 혹여나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면 낙인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위티 집행위원회 모임에서 '우리가 원하는 성교육'을 주제로 동료들과 세미나를 진행하는 모습

위티 집행위원회 모임에서 ‘우리가 원하는 성교육’을 주제로 동료들과 세미나를 진행하는 모습

<너의 권리를 주장해> 한국판 출간이 반가운 이유

이 책은 성적 권리를 포함해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기반한 보편적인 권리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그래서 카스트 제도나 총기 폭력처럼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인권 침해 사례를 다룰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번역판 출간이 반가운 이유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억압이, 한국 땅에 발 딛고 선 우리가 겪는 억압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페루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인 니콜 데 라 크루즈는 임신을 한 또래 친구들이 낙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보며 포괄적 성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에 사는 나는 학교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일상적으로 들으며 자랐고,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고민하다 포괄적 성교육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지난달에는 위티의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우리가 받고 싶은 성교육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니콜과 나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속에 몸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이야말로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또한, 청소년 활동가들이 마주하는 ‘흔한 통념에 반박하기’ 장을 따로 마련해놓은 것도 흥미롭다.

어린이 · 청소년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이 너희들을 위한 최선인지 모르고 판단력도 부족해.

→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하는 논리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면 실수도 하겠지만, 이는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누군가로부터 온전한 권리를 박탈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너의 권리를 주장해> p. 195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내가 활동가로서 정말 수도 없이, 직·간접적으로 들어온 이야기다. 열일곱 살의 나는 그런 시선에 갇히기 싫었던 나머지 내가 충분히 성숙하다는 걸 증명하려 안간힘 썼었다. 비청소년들이 많은 자리에 갈 때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어른스러운 옷을 입고, 두 배 더 논리적으로 말했으며, 가능하면 나이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청소년이든 비청소년이든 우리는 모두 조금씩 미성숙한 인간이며, 그것을 이유로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책 <너의 권리를 주장해> 덕분에, 누군가는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을 것이다. 성숙하지 않아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게 될 것이다. 그와 언젠가 동료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편견에 쉬이 가려지는 것들이 아직 너무 많으므로. 우리의 강인함, 주체성, 그리고 성적 욕망…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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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책 입체 버전, 회색 바탕에 노락색 포인트 박스가 있고 박스 안에 너의 권리를 주장해라는 타이틀이 써져 있음.


1. [논평] 왜 누구에게는 ‘N번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일탈계였나 (위티, 2020.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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