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100주년기자회견 김희진님
2020년 한글날을 하루 앞둔 날, 국제아동인권센터는 언어에 담긴 아동인권을 조명하고자 “-린이”라는 용어를 살펴보는 카드뉴스를 게시하였다. 게시글을 올린 직후, 그간 센터로서는 경험한 적 없었던 다수의 댓글이 달렸다. 그것도 이게 무슨 소리냐, 잘 모르고 배워야 하니까 애들이지, 이 글을 쓴 사람이 색안경을 쓴 것 같다는 부정적인 댓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10개 남짓한 댓글이 연일 달렸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댓글 두어 개만 남아있다. 그래도 그때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카드뉴스를 만들었던 동료가 센터에 비방댓글이 너무 많다며, 게시글을 내리는 게 좋을지 주말에 연락을 취해왔을 정도다.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나는 동료가 만든 한글날 카드뉴스를 보기 전까지 “-린이”라는 용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디지털 기기와 친하지 않은 터라, 스마트폰으로는 문자와 전화 외에 뉴스 검색이 고작이고, 각종 게시글 댓글은 보지도 않는 사람이다. 게임은 물론 유튜브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디서 이런 신조어가 만들어졌는지, 카드뉴스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합당한 문제제기에 저런 댓글까지 달릴 줄이야. 댓글을 걱정하는 동료의 연락을 받은 직후, 배우자에게 물어보았다. “-린이”라는 용어를 아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튜브 게임방송을 종종 챙겨보던 그는 게임 채팅창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라며,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하였다. 오히려 귀엽지 않냐며, 나쁜 의도가 아니라 설명하였다.






국제아동인권센터 인스타그램(@incrc_org) 2020.10.08 게시글
“귀여운 어린이”, 우리 사회가 아동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인식이 아닐까.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귀여움의 정의가 아동의 이미지를 정체화한다. 귀여운 아동의 사랑스러움은 성인의 관점에서 평가된다. 시끄러운 아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 버릇없는 아이는 사랑의 매로 가르쳐야 하고, 과거와 다르게 정신적·신체적으로 빠르게 성숙한 요즘 청소년의 처벌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여론, 학생의 인권이 교권을 침해하고, 아동생활시설에서 아동인권만 지나치게 강조해 시설 종사자의 인권은 전혀 보호되지 않는다는 토로도 나온다. 인권에 대한 왜곡된 인식 속에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는 아동의 존재성은 여전히 미약하다.
아동 또한 성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
아동 또한 성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인권의 주체라는 원칙을 국제사회가 합의한 때로부터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다.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아동권리협약은 전 세계 196개 국가가 비준하며 그 위상을 공고히 했고, 한국도 1991년에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이후 아동권리 존중, 보호, 실현을 위한 책무를 부담해 왔다.
그 과정에 분명 많은 성과도 있었다. 남녀의 혼인연령을 만 18세의 같은 나이로 상향했고, 부계혈통주의에서 부모양계혈통주의로 전환하였으며, 아동의 부모 면접교섭권에 대한 권리가 법상 명시되었다. 입양이 아동의 복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입양숙려제와 국내입양 우선 등을 명시하는 입양특례법 전부개정과 입양에 대한 법원허가제도 전면도입되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어린이집, 유치원, 가정을 포함한 모든 환경에서의 체벌금지가 법제화되었고, 학생인권조례와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 등 각 지역의 인권규범을 통한 아동·청소년 인권 증진의 노력도 있었다. 성매매의 자발성을 의율하며 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부과하던 대상아동·청소년 규정이 삭제되었고, 선거권 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이후 18세로 하향되었다.
물론 소년법 적용 연령이 12세에서 10세로 낮아지고, 학교폭력을 처벌 중심의 관점으로 다루는 등 후퇴한 제도도 있고, 차별금지법 제정,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 도입, 입법·사법·행정의 전 영역에서 아동 참여권 보장 등 긴 시간 변하지 않는 이슈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더디지만 조금씩 법과 제도가 개선되었고, 그 모든 흐름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아동·청소년의 목소리, 아동인권을 옹호하는 시민의 연대가 있었다.
긴 시간의 역사가 아동의 권리주체성을 증명하고, 아동인권의 의미를 뒷받침하는데, 우리 사회는 어찌하여 여전히 아동은 미숙하다고, 부족하다고 단언하는가.
아동인권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 세계가 깨달은 가장 획기적인 이념은 “사람은 존재 자체로 인권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권리보장의 정도와 방법은 저마다 타고나고 축적 가능한 자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모든 인간의 동등한 자유, 존엄과 권리”와 함께 “이성과 양심, 형제애의 정신”을 확인한 것이 오늘날 관습법의 지위를 획득한 세계인권선언이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그 제목에서부터 ‘보편성’을 언급하여,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거나 통한다는 보편성이 인권의 핵심임을 명확히 하였다. 인권의 내용은 존재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인권이 오롯이 존중되고, 부당한 침해로부터 보호받으며, 더 나은 인권의 증진을 도모하기 위한 상호연대의 협력을 요청할 뿐이다. 아동인권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령과 발달적 특성상 힘의 우열관계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아동의 권리는 사회 모든 구성원의 지지와 안내, 이해 속에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동권리협약을 채택한 이들은 그 의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동은 물론 성인 모두에게 협약의 원칙과 규정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제42조의 규정은 아동권리 이행에 필수적이다.
개인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모든 사회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아동들은 권리의 주체로서 간주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42조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만약 아동 주변의 성인, 그들의 부모나 기타 가족 구성원, 교사 및 보호자가 협약의 합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권리 주체로서 아동의 동등한 지위를 확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많은 아동들에게 협약상의 권리가 실현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 유엔아동권리위원회 채택 일반논평 제5호(2003),「아동권리협약 이행을 위한 일반조치(제4조, 제42조, 제44조)」, CRC/C/GC/5, para.66.
<너의 권리를 주장해>는 모두를 위한 아동인권 실현에 동참하는 귀한 안내서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행동에 나아간 아동인권옹호가의 목소리를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벅차다. 어른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사회는 어른의 목소리가 더 쉽게 전달되고, 쓰였다. 일상에서 들려지는 아동의 목소리와 이들의 연대는 숱한 기록물 사이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대중이 다루는 아동인권 활동가는 ‘대단한 아이, 자랑스러운 아이, 미래의 희망’으로 포장된 소수의 사례라는 아쉬움을 적극 해소해준다. 전 세계에서 나의 삶과 이웃의 삶을 위해 행동하는 옹호가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지치지 말아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공해준다. 그의 바람과 나의 소망이 맞닿아, 그 누구라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엄한 삶의 기회를 지킬 수 있기를 더 간절히 바랄 수 있었다.
아동의 인권은 아동이라는 한 사람의 복합적인 삶의 모든 현실
2018년 방영된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 독립운동을 진행하며 산속에 은거하던 고애신이 배고파하는 한 아이에게 자신의 몫인 쌀 한 움큼을 건넨다. 아이의 엄마는 “애나 어린이자 고픈 매는 매한가지”라며 거절하지만, “그건 매한가지나, 아이가 굶는 건 어른의 잘못이거든. 사과의 뜻이란다.”던 고애신의 대사를 떠올려본다. 어른의 책임. 이 사회에 어른의 책임은 얼마만큼의 공감으로 남아있을까.
노키즈존의 영업주는 ‘아동보호’를 명목으로 내세우지만, 안전한 가게 이용의 대상에 아동이 배제될 이유는 전혀 없다. ‘안전’이란 아이와 동행한 부모가, 옆자리에 앉은 다른 손님이, 그리고 영업공간 전체를 관리해야 할 주인이 함께 지켜내야 한다. 아이의 적절한 돌봄과 지도에 소홀히 할 수 있는 부모가 이유라는 변명은, 아동학대는 가정의 일이라는 닫힌 시각과 다르지 않다.
소년범죄는 어떠한가. 최근 <소년심판>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지만, 나는 차마 보지 못했다. 포스트 전면에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는 문장을 크게 써 붙인 드라마를 볼 용기가 안 났다. 혐오라는 단어는 미움, 증오의 어감 이상으로 강하다. 그 존재 자체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시각을 담는다. 소년범 문제를 처벌 강화와 연령 상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소년에게 범죄를 알려준 세상의 책임은, 소년에게 내 삶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주변 이들의 책임은 어디 갔느냐고. 아동의 발달하는 권리는 시간을 쌓아가는 연속적인 과정인데, 그 소중한 시기를 지키지 못한 결과를 어떻게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느냐고.
한편, 선거권 연령을 낮추는 것에 비례하여 형사책임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권리의 보장이 곧 보호의 포기와 같을 순 없다. 아동권리협약이 만 18세로 정의한 아동의 연령은 국제사회의 갖가지 이견 속에 10년이 넘는 진통을 겪고 가까스로 이뤄낸 합의이다. ‘최소한’ 만 18세까지는 아동권리협약이 확인한 아동의 권리 실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리 실현을 위한 조건이다. 자유권규약 위원회도 “자유권규약 제24조(어린이의 권리)의 이행은 제2조에 따라 모든 사람이 동 규약이 규정한 권리를 향유하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당사국이 취해야 할 조치와 더불어 아동보호를 위한 특별조치의 채택을 수반한다. 본 위원회는 제24조에 규정된 권리가 동 규약이 아동에 대해 인정하는 유일한 권리가 아니라는 것과 아동은 개인으로서 동 규약에 명시된 모든 시민적 권리의 이익을 받는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밝혔다(일반논평 제17호(1989), 제1-2항). 아동은 출생 자체로 자유권, 사회권의 같은 권리를 갖지만, 그 권리의 실현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취지이다. 참여와 표현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향유를 위한 연령 하향은 각국의 입법적 결단이다.
“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면 실수도 하겠지만, 이는 어른도 마찬가지(p.195)”라는 책의 발언을 빌려본다. 누적된 경험은 더욱 성숙하고 확장된 시민의식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그러한 연령과 소년법 적용, 의무교육의 보장, 피해자 지원 등의 보호조치는 당연히 병존하여 이행될 수 있다.
이뿐일까. 아동의 인권은 아동이라는 한 사람의 복합적인 삶의 모든 현실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인권의 형태로 삶에 켜켜이 쌓여간다. 그렇기에 아동인권을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아동인권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연대의 손길이다. 그 권리가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주장될 수 있기를, 권리 주장에 부응하는 사회적 논의가 기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이 책을 함께 읽길 권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 시절은 아동인권 옹호에 함께할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