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통의 메일을 통해 제가 21년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년 넘도록 꾸준히 무엇을 하고 있는 건 직장생활과 국제앰네스티 회원 이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조직 모두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조직이라는 것도 여전한 사실입니다. 지부의 요청으로 시니어 회원으로 MZ세대 회원들과 교감 할 수 있는 내용의 기고를 요청받았습니다. 어떤 울림을 통해 공명을 이뤄낼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앰네스티를 처음 만날 그날부터 오늘까지의 연대기를 읊어 보려 합니다.
90년 중반쯤의 기억입니다. 그날도 정부 기준으로 폭력이 수반된 ‘불법집회’에 참여했고 최루탄 한 바가지쯤 뒤집어쓰고 집으로 온 날이었습니다. 방에서 그날의 유인물들과 시사주간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읽어 내려가던 잡지 중간 부분에서 국제앰네스티의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여기서 사람들이 일하다가 손목이 날아가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이 되는 세상인데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쓰자고? 또 그렇게 쓴 편지 때문에 그 나라의 인권상황이 좋아진다고? 그리고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뭐 이런 종류의 의심과 질문과 반문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궁금하면 못 참는 편이라 그때부터 조금씩 앰네스티에 대해 찾아보고 알아보길 시작했습니다. 상식선에서 알고 있었던 ‘사면을 위해 국제적인 캠페인을 하는 조직’을 넘어 앰네스티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조직의 탄생 비화부터 흥미진진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청년들이 술을 마시다 건배사로 ‘자유를 위하여!’라고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간 일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기사로 본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네슨이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고와 탄원 편지를 쓰면서부터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쓰자고? 내가 쓴 편지 때문에 그 나라의 인권상황이 좋아진다고? 그리고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김규환 회원 기고글 본문 中
20대 전부를 90년대에 보낸 제게 90년대는 시작부터 카오스였습니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꿈꾸며 대학에 입학했지만 이미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를 선언한 후였고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 그리고 동네 큰길 건너 살던 김귀정 열사와 5월 분신 정국 열사들의 죽음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당해야만 했던 교회 형님까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야학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학생회 활동으로 또 공개학생 정치조직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 분명하고 선명한 것이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문제를 발견하기에 바빴고 발견한 문제의 가장 선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던, 아니 그렇게 살아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도 여전히 다른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으나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나라에서 발생한 일에 발음조차 힘든 누군가의 석방을 요구하는 엽서 한 통이 얼마나 힘이 될까싶었습니다. 그래서 20대 시절 내내 앰네스티는 가진 자들의 여유에 기반한 한가로운 운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잠시 접어두었습니다. 그보다는 오늘 여기서 부당한 사건을 폭로하고 그 정당한 폭로를 폭력으로 가로막는 정부에 온몸으로 싸워 국가의 본질이 폭력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보다 구체적인 실천이라 믿었습니다.
30대가 되었지만 제 눈에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부당함과 불평등이 가득했습니다. 다만 저 스스로는 조금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과 꾸준히 문제를 발견하고 알리고 해결을 위해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저런 고민을 이어오던 중 직장에 계셨던 회원분이 직장 내 앰네스티 그룹 모임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인권 혹은 세계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그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크고 거창하고 부담되는 모임이 아니라 점심시간을 활용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탄원 사례를 함께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고 관련된 이슈에 대해 편히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는 언제나 탄원 편지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소소한 활동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모임으로 자신감이 생기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학내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유인물을 준비하고 서명판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직장인들이라 점심시간 한 시간이 전부였지만 여럿이 함께 만드는 작은 변화였습니다. 또 그렇게 몇 번의 학내 캠페인에 자신감을 얻어 거리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2~3개그룹이 연합하여 하나의 이슈를 두고 대학로와 명동 등에서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회원 활동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어 왔지만 2000년대의 활동은 이렇게 오프라인을 위주로 대면하는 형태의 활동들이 많았습니다. 2010년 전후로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국 이슈에 대한 부분입니다. 자국 이슈의 경우 자국의 활동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2010년 이후 국내 농수축산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캠페인,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의 석방을 위한 캠페인, 광우병 촛불 시위 당시 경찰을 불법적 시민 채증에 대한 반대 캠페인 등 이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활동도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인권 문제가 해결되었음 알리고 우리 스스로 해산을 선언하는 극적인 반전이 없는 한, 앞으로의 21년도 꾸준히 앰네스티의 회원일 거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인권 이슈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그 누구보다 끈질기게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몇 가지 경계해야 지점들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국제 인권 단체의 회원들이며 동시에 인권옹호자입니다. 인권옹호자에게는 국경이 따로 없습니다. 저 멀리 벨라루스, 차드, 말라위, 감비아, 기니, 몰도바, 온두라스 등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상황이나 오늘 여기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상황이나 같은 무게로 여기면 좋겠습니다.
둘째, ‘여럿이 함께’하는 활동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빙충맞은 성정이라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 무엇을 한다는 일이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만 지난 21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제가 가장 즐겁고 신나게 앰네스티 활동을 했던 시기는 ‘여럿이 함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여러분도 느껴 보시길 권합니다.
마지막으로 앰네스티에 대해 공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활동해왔고, 어떤 이슈를 어떻게 다루고,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더불어 한국지부에 대해서도 공부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지부도 열심히 회원 활동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고(故) 허창수 신부님, 고(故) 배영근 신부님 두 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번은 찾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누군가 제게 만약 과거로 돌아가 앰네스티를 권하면서 ‘이거 20년쯤 할 수 있겠어?’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분명 ‘아니요’라고 대답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21년째 회원인 이 시점에서 ‘앞으로 20년쯤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라고 물으시면 ‘물론이죠!’라고 답하겠습니다.
앰네스티는 여럿이 함께 손잡고 더불어 오래 할 수 있는 인권운동의 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제가 여전히 앰네스티 회원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규환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