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서는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나영이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지난 2008년 8세 여아가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사건에 가명 ‘김나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영이 사건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성폭행 범죄에 ‘조두순’, ‘김길태’, ‘유영철’과 같이 가해자의 이름이 공개된 경우나 종종 ‘나영이’ 사건과 같이 가명으로 피해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실명으로 성폭행 피해자를 공개하거나, 당사자가 직접 실명으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던 것이지요.
<나영이가 그린 그림>
이네스 페르난데즈 오르테가. 발렌티나 로센토 칸투. 지금 이 이름의 주인공들 역시 흔히 그래왔듯 피해자의 가명을 쓴 것일까요, 아니면 믿기 어렵겠지만 실명을 쓴 것일까요?
<이네스 페르난데즈 오르테가, 발렌티나 로센도 칸투>
2002년 어느 날, 이네스는 아이와 함께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평화로운 저녁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집에 군인 세 명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발렌티나는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17살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그녀들의 이야기는 흡사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됐던 ‘도가니’를 연상케 합니다. 청각장애아들이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고도 장애 때문에 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언어 장벽에 부딪히고, 법적 절차를 밟을 여건이 되지 않는 빈곤 가정 출신이라는 경제적 장벽에 좌절했으며,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약자와 차별 대상에 속해 있다는 사회적 장벽에 부딪혀 정의를 구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 말입니다.
<영화 도가니>
멕시코에서는 선주민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한 성폭행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그녀들은 언어, 사회적, 경제적 장벽에 부딪힌 멕시코판 ‘도가니’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선주민으로서의 삶은 이러합니다.
그녀들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피해 사실을 전달하는 데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선주민 언어를 쓰기 때문에 공용어인 스페인어도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녀들이 겪는 언어 장벽입니다.
대개 선주민들은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근근이 해결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변호사를 고용하고,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법적 절차를 밟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경제적 장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지요.
마지막으로 선주민 혈통이라는 것은 멕시코 사회에서는 소수민, 약자, 차별의 대상이 되어 늘 사회적 장벽에 부딪혀 왔습니다. 이것이 선주민 여성으로서 그녀들이 겪은 사회적 장벽인 것입니다.
영화 ‘도가니’에서 서유진 간사가 판사에게 청각장애아들이 법정에서 오가는 말들을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수화통역가를 요청했다가 강제로 끌려 나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네스와 발렌티나는 현실에서 비슷한 경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어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들이 신고를 했지만 담당 군 조사관에게 돌아온 말은 “당신들이 ‘직접’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거’를 대라”는 것이었죠.
그녀들이 성폭행을 당한 것을 신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두려움, 여성으로서의 수치심,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피해자에게 ‘직접’ 성폭행을 당한 ‘증거’까지 수집하라는 명령을 한 담당자의 책임 전가 행위나, 청각장애아를 위한 수화통역가를 불러 달라는 요청에 강제 퇴장 명령을 내린 법원의 행태는 당연히 국민을 보호, 존중해야 할 의무를 져버린 국가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서두에서 드린 질문에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네스 페르난데즈 오르테가. 발렌티나 로센토 칸투. 그녀들의 이름은 바로, 실명입니다. 선주민 여성으로서 갖은 고난을 겪은 그녀들이 결국 실명으로 세상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입니다.
그녀들은 말합니다.
“제가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침묵하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싸운다면, 언젠가 우리를 성폭행한 군인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가는 길에 희망과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여성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부가 우리의 존엄성을 뺏을 수 없습니다. 메파족으로서의 존엄성 말입니다.”
그녀들은 멕시코 법원과 국제재판소에 제소했고, 마침내 작년 8월 미주인권재판소는 멕시코 정부에 이 사건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군법체계를 개혁하며,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주인권재판소의 판결은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 영화 ‘도가니’의 실제 모델이었던 광주인화학교에 폐교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영화와 소설이 사회에 일으킨 반향이 대국민 서명운동으로 이어졌고, 이에 많은 이들이 힘을 실어 실제로 서명운동에 참여한 결과였겠지요.
국제앰네스티는 전세계적으로 매년 말 편지쓰기마라톤 행사를 통해 사람들의 편지를 모아 변화의 힘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번 2011 편지쓰기마라톤에서는 이네스와 발렌티나를 위한 서명과 편지를 모으고 있는데요. 개인 하나하나의 서명들이 모여 광주인화학교의 폐교명령에 큰 힘을 실었듯이, 여러분들의 서명과 편지 하나하나가 그녀들에게 정의를 실현해 주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편지로 멕시코에 있는 그녀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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