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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 북한의 코로나19 초기 방역 리뷰

2023년 5월 5일 국제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에 대해 내렸던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앞서 WHO는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2020년 1월 비상사태를 선언한 바 있다. 3년 4개월 넘게 지속된 코로나19 비상사태가 공식적으로 해제됨에 따라 머지않아 엔데믹에도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게 되었다.

이 기간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국제적 차원의 공동 대응을 모색해 왔지만, 유독 한 국가는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난 채 빗장을 걸어 잠그고 독자적인 대응을 고집해 왔다. 이 나라는 바로 북한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가 워낙 부족하기에 우리는 아직 실제 북한의 코로나19 상황이 어떠했고, 현장 방역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인권 침해가 발생했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22년 8월 10일 열린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에서 코로나19 위기 완전 해소를 선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북한의 코로나19 대응 흐름

북한의 코로나19 초기 대응은 그 어느 나라보다 신속했다. 2020년 1월 당국은 방역을 위해 ‘국가비상방역체계’로 전환하고 육해공 국경을 전면 봉쇄했다. 당국은 국제사회에서 내민 도움의 손길을 공식적으로는 모두 거부한 채 자력으로 코로나19 대응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실제 전국적으로 엄중하고 강도 높은 방역 조치를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2년 넘게 ‘확진자 0명’ 입장을 고수하던 당국은 2022년 5월 12일 확진자 발생을 처음 공식 인정하고 ‘최대비상방역체계’를 선언했다. 같은 해 8월 10일 당국은 코로나19 위기의 완전 해소를 주장하며 ‘정상방역체계’로 방역 등급을 낮췄다. 당국은 이에 대해 ‘위대한 우리 인민이 쟁취한 빛나는 승리’라고 평가하며 코로나19 방역 승리를 자축했다.

 

2022년 코로나19 방역을 독려하기 위해 북한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한 선전화

알려진 정보

하지만 속속 드러나고 있는 북한의 코로나19 방역은 결코 주민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강력한 국경 봉쇄와 이동 통제로 인해 북·중 국경지역에서의 민간 교역이 줄고 내부 물자 이동이 제한됨에 따라 식량 가용성과 접근성이 악화되는 등 주민들의 경제 전반이 전보다 피폐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탈북 시도자 역시 2019년 대비 급감했는데 2020년 중순 월경자에 대한 현장 사살 방침이 내려진 후에는 탈북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새로 생겨나거나 심화된 일상 속 각종 규제는 당국이 주민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여러 부문에서 주민들의 인권은 코로나19 전보다 더 악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23년 2월 북중 국경을 순찰 중인 북한 국경경비대

방역 실태 조사의 어려움

국제사회는 북한의 코로나19 발생 동황뿐만 아니라 당국에 의해 실제 주민들의 삶 속에서 방역이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동안 북한 당국이 외부에 공개한 제한된 내용 외에는 이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알려진 내용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북한이 과거에 마주했던 감염병 사례에서 보여준 대응 방식을 참고하여 코로나19 방역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북한 내부 실상을 가장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경로인 탈북인을 만나 최신 정보를 수집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워졌다. 국경 봉쇄가 단행된 2020년 이후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인 대다수는 국경이 봉쇄되기 이전인 2020년 1월 전 이미 북한을 떠나 중국 등 제3국에 머물던 이들로, 코로나19 방역 조치가 단행된 후 북한을 벗어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에는 특히 익명의 대북 소식통을 출처로 하는 ‘~카더라’ 식의 소문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확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체와 진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2023년 3월 코로나19 비상 방역 강조 분위기 속 방호복을 입은 북한 소독 담당자들

방역 정보 수집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이하 한국지부는 코로나19 위기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이 경험한 방역이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신뢰성 높은 정보를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수개월간의 수소문 끝에 한국지부는 2020년 이후 북한을 떠난 사람들 수 명을 직접 만나 심층 면접을 진행하여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이동이 심각히 제한된 상황 속에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 한국에 도착한 극소수 인원 중 일부로, 북한을 떠나기 전까지 북한에서 코로나19 초기(2020년)에 이뤄진 방역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코로나19 초기 방역을 살펴보기로 했다.

워낙 적은 수의 표본으로 인해 이들의 증언만으로 북한의 코로나19 방역을 일반화해 바라보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북한의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거나 당국이 발표한 내용 외에는 북한의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실제 현장에서의 모습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진 내용이 드문 가운데 이들의 증언은 북한의 코로나19 초기 방역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그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참고할 만하다.

 

2020년 8월 북한 평양의 한 안경점에서 발열 체크를 하는 평양 시민들

증언자 특성

2020년 이후 북한을 이탈한 사람이 극소수인 점을 고려할 때, 증언 전문을 공개하기에는 이들의 신원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존재한다. 이에, 한국지부는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이들의 증언에서 코로나19 방역과 관련된 내용만 간추려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아래 글에 등장하는 증언자는 총 3명이며 이들의 인구학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 출신 지역: 함경북도 북부 1명, 함경북도 남부 1명, 강원도 1명
  • 성별: 여성 1명, 남성 2명
  • 연령대: 20대 1명, 30대 2명
  • 탈북 시기: 2020년 중순 2명, 2021년 초 1명

 

2020년 2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마스크를 생산 중인 북한 노동자

방역 관련 증언1)

1. 방역 조치 실시 시기

A 씨 2020년 2월에 코로나19 방역이 시작되었다. 마스크도 2020년 2월부터 착용했다.
B 씨 코로나19 때문에 ‘빡세게’ 하기는 2020년 1월 초 부터인 것 같다.
C 씨 2020년 1월 말부터 마스크를 썼다.

 

2. 마스크 입수, 착용

A 씨

2월부터 직장이든 어디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못 들어갔다. 무조건 마스크를 쓰라고 했기 때문에, 집에서 천으로라도 만들어 쓰라고 해서 다 쓰고 다녔다.

마스크는 사야 했다. 마스크는 개인들이 장마당 그런 곳에서 팔았다. 개인이 만든 천 마스크도 있었고, 여기 한국에서 쓰는 것과 같은 일회용 마스크도 있었다. 일회용 마스크는 중국에서 들어오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마스크를 ‘유엔 마스크’라고 불렀다. 그건 의료용 마스크이니까 유엔 마스크라고 했던 거 같다. 아마 예전에도 그런 마스크가 있었겠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쓴 적은 없었다.

마스크는 북한 돈으로 한 장당 1,500원에서 2,000원 정도 했다. 이 가격은 비싸진 않고 살 만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매일 사지는 않았다. 마스크는 흔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했다.

B 씨 2020년 1월 초, 중순부터는 마스크 단속을 세게 했다. 마스크를 안 쓰면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다녔다. 어디를 가도 계속 단속하는 사람이 있었다. 단속 당하면 끌려 다니고 그러니까 마스크를 쓰고 다닐 수밖에 없다.
C 씨

마스크 안 쓰면 밖으로 못 다니게 일단 통제를 했다. 마스크에는 일회용 마스크와 천 마스크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회용 마스크는 북한의 상황에서는 조금 비쌌다. 그건 어차피 하루밖에 못 쓰지 않나? 그러다 보니까 천 마스크를 많이 썼다. 일회용 마스크도 그렇고 천 마스크도 장마당에서 구했다. 천 마스크는 한 번 사면 빨아서 계속 썼다. 가격은 되게 다양했는데 마스크 1개당 북한 돈으로 1,500원부터 10,000원까지 있었다. 되게 이쁘고 그런 건 비쌌다.

옷 만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마스크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왔다. 국경이 닫힌 상황이었지만 예전에 겨울용 마스크로 중국에서 들어온 것도 많이 있었다. 딱히 코로나19 때문에 있었던 게 아니고, 그 이전부터 겨울엔 워낙 추우니까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19가 터져버리면서 그게 일상이 되었다.

 

3. 이동 통제

A 씨 한 2020년 6월인가 7월에 그때부터 군(郡)과 군 사이를 못 벗어나게 했다.
B 씨

전에도 그렇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게 힘들고 그러진 않았다. 코로나19 당시에도 이동하는 건 힘들지 않았다. 코로나19때 새로 생겨난 초소 같은 건 내가 모를 수는 있겠지만 위생방역 그런 걸로 해서 불시에 포치공지 또는 알리는 것받아 나와서 여행자들 단속하고 그랬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코로나19 기간에 많이 다녔다. 마스크만 쓰고 다니면 되니까 코로나19 기간이라도 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C 씨 도(道) 단위로는 못 가게 했다. 예를 들어 함경남도에서 함경북도 가는 게 안 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그런 걸 많이 통제했다. 같은 도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3, 4명 이상은 못 모이게 했다. 예전에도 다른 도로 이동하는 게 어렵긴 했다. 그런데 그게 코로나19로 인해 더 어려워졌다. 여기 한국처럼 내가 ‘가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갈 수 있고 그런 게 아니다. 한국으로 치면 구청이나 주민센터 가서 서류에 도장 다 찍은 다음 보안서든 뭐든 다 거쳐야 하니까, 한 번 가려면 너무 어렵다.

 

4. 방역 단속

A 씨

밖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는데 한 100m에 하나씩 규찰대가 있었다. 여맹 규찰대가 그런 단속을 했다.

그리고 ‘코로나초소’라는 없던 초소가 또 하나 생겼다. 기존 초소와 별개의 완전 새로운 초소이다. 거기에서는 ‘코로나상무’가 단속을 했다. 코로나상무는 새로 생긴 조직이다. 코로나상무도 다른 상무처럼 여기저기서 한 명씩 모아서 만든 조직이다. 이 사람들은 정말 힘이 막강한 사람들이다. 만약 지금도 코로나19가 북한에 있다면 코로나상무가 있을 거고, 없으면 없지 않을까?

B 씨

당기관, 행정기관, 보위기관으로 구성된 ’코로나상무’라는 게 조직되었다. 코로나상무가 조직된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르겠다. 2020년 초반인 것으로 생각한다. 상무라는 것은 당일군(일꾼), 행정일군, 근로단체, 검찰, 보위 이런 사람들이 다 속해 있는 그루빠비상설 검열, 단속 조직이다. 이 사람들이 단속을 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직장마다 그리고 여맹, 청년동맹, 직맹에서도 단속 체계가 나와서 정말 엄격하게 했다.

상무 조직이 길을 다니며 다 하고 그런 건 아니다. 그 사람들은 수가 제한되어 있지 않겠나? 이 사람들의 지시 하에 여맹, 청년동맹 그런 조직들이 움직인다. 북한은 당 기관이 최고이다. 당일군을 중심으로 그 옆에 보위지도원, 보안원 뭐 그런 사람들이 다 모인 그루빠 사무실이 따로 있다. 이 사람들이 여맹이면 여맹, 청년동맹이면 청년동맹, 대학생들 다 포치한다. 그러면 거기서 규찰대라고 해서 다 길에 나와서 층층이 걸쳐서 단속한다. 만약 말을 안 듣는다든가 하면 그 사람을 그루빠에 데려간다. ‘이 사람을 단속했는데 저항했다’ 이런 식으로 보고되면 소속, 당원 여부부터 조사가 들어간다. 당원이면 더 엄중하게 본다. 그러면 이 사람은 당적으로 완전 비판 무대에 오르고 사상투쟁도 하게 되면서 망신당한다. 근데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없다.

장마당의 경우 입구에 들어갈 때 시장 관리원들이 서 있다. 사람들이 시장에 들어가면 시장 관리원들이 사람들 손에다 소독제를 다 쳤다. 양손 앞뒤 다 소독제를 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런 게 다 있었다. 식당 들어갈 때도 소독제 다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여럿이 막 뭉쳐서 다니고 그러지 못했다.

C 씨

통제는 인민위원회에서 많이 하고 길에 규찰대도 있다. 여맹 규찰대, 대학생 규찰대 이런 사람들은 옷차림부터 다 단속하는데 그때는 마스크까지 단속했다.

북한의 방역은 첨단이지는 못하다. 뭐가 없으니까. 근데 그래도 의사들이 많지는 않지만 인민반별로 담당 구역을 정해서 매일 돌게 만들었다. 처음엔 문 손잡이에도 방역한다고 뭐를 붙여 놓고 그랬다. 그런데 매일 잡으면 오염되지 않나? 그건 아니다 그래서 또 다 풀어버리고 그렇게 했다. 북한은 집집마다 ‘~를 미리 막자’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붙이게 하기도 한다. 그런 걸 다 하게 해서 안 하면 또 안 된다. 집 출입문, 대문 앞에 몽땅 다 붙이게 한다. 그러면서 계속 눈으로 보는 거다.

 

5. 소독

A 씨

소독은 소금물 끓인 게 있었다. 흑연 판 두 개를 선으로 연결해서 각각의 판에 +극, -극을 연결한 다음 그 물을 끓이더라. 그 물을 식힌 후 조금씩 받아서 손 씻고 그랬다. 직장에서는 항상 그 물로 손을 씻어야 했다. 직장뿐만 아니라 어딜 가나 다 그렇게 소독물로 손을 씻었다. 직장들은 자체적으로 그 물을 만들어 썼다. 위생방역소에서는 집에서도 그렇게 소독해라고 그렇게 끓인 물을 나눠줬다. 위생방역소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크게 하는 역할은 없었다가 코로나19 기간에는 방역 일을 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 물이 피부에 엄청 안 좋다. 소금물이다 보니까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 물을 안 묻히려고도 했다. 집집마다 그 물을 엄청 나눠주었지만 그걸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 물이 너무 많으니까. 그냥 나라에서 하라고 하니까 쌓아 놓기는 했다.

B 씨 ’흐르는 물에 손을 씻어라’고 했고, 항상 소독수라는 게 따라다녔다. 회사 출근하면 소독수가 있었다. 소독수는 여기 한국으로 치면 알코올 냄새가 나는 손 세정제이다. 한국처럼 북한에서도 알코올로 소독을 했다. 알코올은 직장에서도 그렇고 일반 사람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도 알코올을 생산해서 손 소독제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C 씨 소독제는 알약으로 줬던 것 같다. 집집마다 줬다. 그걸 물에 탄 후 거기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손을 자주 씻으라고 했다. 북한에는 위생방역소라고 거기서 나와서 버스 같은 거를 매일 방역하게끔 했다. 무슨 용액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계속 뿌리게 했다. 그걸 안 하면 버스 운행을 하지 못하게 했다. 북한은 위에서 뭘 시키면 그거 하나는 철저하게 한다.

 

6. 격리

A 씨 열 나는 사람은 격리되었다. 그리고 바다를 몰래 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걸려서 그 사람은 교화 가고 그 가족은 집 밖을 못 나오도록 그 집을 아예 다 막아 버렸더라. 집 마당이 있는데 마당 밖을 못 나오게 했다. 그 사람 집 주변에 ‘접근 금지’ 이런 글자가 적혀 있는 푯말을 엄청 심하게 막 세워 놨다. 뭐 코로나19에 걸렸을까 싶어서이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엄청 역적 취급하기도 했다.
B 씨 격리될 사람이라는 거 자체가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은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봉쇄를 한 상황이었다 보니까 여기 한국처럼 세계 각지에서 사람이 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딱 닫아 놓은 상황이라 일체 코로나19가 없었다.

 

7. 체온 측정, 검사

A 씨 체온계가 직장에 있었다. 직장 나가면 하루에 열 체크를 3번 했다. 아침 출근 때 한 번, 중간에 일 하는 도중에 한 번, 그리고 퇴근하기 전 한 번 이렇게 해서 총 3번을 했다. 37도가 넘으면 증상이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런 식으로 열 체크도 하고, 소독하는 물로 여기 저기 다 뿌리게 하고, 그 물로 손도 씻고 그랬다.
B 씨 사람들이 많이 밀집하는 그런 곳은 들어갈 때 체온을 쟀다. 시장, 직장, 학교도 다 그렇게 했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의학이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대충 갖출 건 갖추고 있다. 담당 병원, 의사가 다 있어서 만약 열이 난다고 하면 아마 검사를 했을 거다. 그런데 나는 코로나19 검사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주변에 코로나19 걸린 사람도 없었고 검사를 받았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C 씨 북한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적은 없다. 내가 한국으로 올 때 까지만 해도 북한에 코로나19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8. 정보 접근, 방역 안내

A 씨

나라에서 코로나19에 대해 알려줬다. 그리고 계속 코로나19가 어떻고 무서운 병이고 위협적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엄청 죽어 나가고, 어떻게 죽어 나가고 그런 거도 알렸다. 그런 건 TV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TV에서는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가는 모습도 보여줬다. 뉴스 같은 거 끝나고 세계 소식을 알려주는 게 한 5분 정도 있는데, 그때마다 다른 나라 코로나19 상황을 알려줬다. 몇 명이 걸렸고 그런 거. 원래 그때는 체육 종목이라던가 그런 거만 보여줬는데 코로나19 때는 다른 나라의 코로나19 상황을 알려줬다. 그리고 북한이 제일 잘 하는 게, 그런 영상 번역을 북한 상황에 맞게 번역을 잘 한다 감정을 막 풍부하게 넣는다. 그런 걸 잘 해서 자막에 사람들이 “살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걸 해 놓고 그걸 계속 방송으로 쏴 준다. 사람들이 피토하고 그런 걸 보여 주면서 코로나19가 무서운 거라는 걸 계속 심어준다. 그런 식의 방송은 거의 매일 나왔다. 쉴 새 없이 나왔다. 여기 한국에서 TV 방송을 보면 방송 사이에 광고가 나오지 않나? 그렇게 나오듯이 코로나19와 관련된 내용이 그 정도로 자주 나왔다.

강연회 같은 거도 계속 했다. 나는 직장에서 참여했다. 매일 했다. 우리 직장에서는 코로나19 방침에 대해 매일 말해 주더라. 매일 아침마다 다 모인 상황에서 그런 걸 했다. 코로나19 관련해서 당에서 어떤 방침이 내려왔고, 그런 걸로 해서 어떻게 하고, 예를 들어 하루에 열 체크 3번 하고, 소독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런 걸 알려줬다.

B 씨

당시 나라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해 알려줬다. 북한은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각 인민반, 직장에서 포치가 내려온다. 2중, 3중 코로나19 방지, 그리고 예방을 하고 위생방역소에서도 나와서 포치를 하고 손 씻기부터 안전규칙 그런 거 다 알려줬다. 북한은 그런 거 ‘빡세게’ 한다. 그런 포치가 2020년 1월부터 시행되었다.

북한은 직장 같은 경우 아침 일과를 시작할 때부터, 여기 한국에서도 회사를 나가면 조회하는 것처럼 조회할 때부터 행정적으로, 당적으로 포치를 한다. 하루 일과 시작부터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걸 포치한다. 귀 아플 정도이다. 그러니까 항상 각성이 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 너무 알려줘서 귀 아플 정도였다. 내용이라는 게, 당적으로 포치 내려온 건데, 뭐 ‘몇 월 며칠, 코로나19 방지를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 이런 거였다. 항상 조회 시작하는 서두에 단위 책임자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당적으로도 포치하고, 코로나19에 대한 총회 같은 거도 하고 그런다.

C 씨

북한에는 당이 하나이다 보니 그게 피라미드 구조로 당 세포까지 내려온다. 그래서 위에서 ‘이렇게 해라’ 하면 아래로 다 전달이 된다. 학생들에게도, 여맹원들에게도 다 그렇게 전달된다. 인민반, 학교 다 그렇다. 조직적으로 전달된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에 대한 교육은 나라에서 계속 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걸리면 어떤 증상이 있다는 그런 내용을 막 알려줬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나 그런 곳에서 직장으로 검열 나와서 임의의 사람을 집어낸 다음 그 내용을 물어보는 거다. ‘네가 만약 몸이 이상하면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 물어보고 잘 대답 못 할 경우 연대적 책임으로 그 직장장이 호되게 비판을 받는 거다. 그리고 4~9명으로 구성된 코로나19 비상 방역 조직인지 뭔지 새로 생겼다. 그래서 부문별로, 직장별로 담당을 둔다. 매일 돌아볼 순 없으니까 전화로 물어보든지, 가까우면 거기로 직접 나가서 아무 때나 교육한 내용을 막 물어봤다. 몰랐을 때는 그 사람들에 대해 처벌하고 그런 식이었다. 그때는 엄청 강력하게 했다.

 

9. 처벌

A 씨

이동 통제를 어긴 사람이 있긴 있는데 처벌까지 받은 건 아니었다. 초소에서 딱 막고 못 가게 한 후 돌려보내고 그랬다.

바다로 몰래 나갔던 사람은 족쇄 채우고 차에 태워져서 교화를 갔다. 그 사람을 데려간 자들은 보위부인가 보안서인가 그랬다. 족쇄를 채워 가는 것은 교화이다. 일반적으로 조사하고 그럴 땐 함부로 족쇄 채우고 그런 건 없다. 그런데 족쇄를 채울 정도면 교화를 가는 거다. 내가 이걸 어떻게 잘 아느냐고 하면, 나도 그때 바다를 나간 적 있다. 그 사람이 속한 팀과는 아니고, 다른 팀과 나간 적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있는 팀이 잡혀 갔으니 옆에 있던 내가 알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안 잡혀 들어가긴 했지만 우리 팀도 돈을 엄청 고이고(뇌물을 주고) 빠져나와야 했다. 다행히 한 두 명한테만 알려지고 소문이 퍼지지 않은 상황이라 가능했다.

B 씨

방역 지침을 어긴 사람은 없었다. 뭐 마스크를 조금 안 쓰고 그런 건 있을 지 몰라도, 저항하고 그런 사람은 없다. 만약 마스크를 안 끼고 가다가 단속이 되었다고 하면, 또라이가 아니고서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무조건 다 쓰고 다닌 이유는, 안 쓰면 어디 다니지 못 한다. 자기가 다니지 못 하니까, 집 밖으로 못 나가니까, 나가면 단속하니까 마스크 없이는 못 다니는 거다. 그리고, 북한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당적으로 포치가 내려온 거는 다 따른다. 그래서 북한이 그렇게 단합이 잘 되는 거다. 그래서 ‘김정은 만세’를 부르고 그러는 거다. 위에서 시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집행을 한다. 그러니까, 그걸 어기거나 그런 건 상상도 못 한다. 그렇게 했다가는 당을 방침을 어기는 건데, 제 죽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북한은 쓰라면 다 쓴다. 안 쓰겠다는 생각을 못 한다. 그 정도 배짱 있는 사람이면 이미 들고 다 뛰었을 거다(탈북했을 거다).

C 씨 방역을 잘 못하면 단련대에 2, 3일 보낸다고 했다. 최고 길면 10일 정도였다.

 

10. 상비약, 백신, 치료

B 씨 약이 많았다. 북한에서도 약을 자체적으로 생산한다. 북한 사람들은 중국약을 안 먹으려 한다. 중국에서 약이 들어오긴 하는데 나는 신약은 먹지 않았다. 나는 산에서 나오는 인삼이나 고급 약재들은 많이 먹었다.
C 씨 북한은 조금 아프고 그러면 병원에 가는 것보다 민간 요법으로 치료한다. 만약 감기 증상이 있으면 ‘아 감기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감기약 먹고 대부분 그렇게 한다. 의사도 별로 많지 않고 의사를 만나기도 어려우니까. 그리고 약이야 어차피 내 돈으로 사 먹어야 하니까 그렇다.

 

11. 유열자(확진자), 감기 또는 유사 증상 발현자

A 씨 내가 탈북할 때 까지는 한 명도 없었다. 내 주변에는 열이 높게 나온 사람이 없었다. 열이 높게 나올 거 같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코로나19 증상 의심자는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 감기에 걸린 증상이 있거나 그렇게 앓다가 죽은 사람들은 있었다.
B 씨 내가 있을 때 코로나19 환자는 없었다. 뭐 북한에서는 그냥 열 나고 하면 감기인 줄 알고 해열제 먹고 그렇게 한다. 주변에 앓는 사람은 못 봤다. 그리고 조금 아파도 티를 잘 안 낸다. 다들 바삐 사니까 그렇다. 북한 사람들은 일단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렇다.
C 씨 감기 걸린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마스크를 쓰다 보니 그 해에 약 파는 사람들이 감기약을 못 팔았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었다. 마스크를 써서 많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거 덕분에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12. 소문

A 씨

한국에서 돈 소문으로는 ‘방역 수칙 위반자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느니 그러던데 내가 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처형까지 당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디 엄청 대단한 무역회사 사장인 거 같았는데, 아무튼 그 사람이 원래는 차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했는데 여맹원이 단속할 때 ‘그냥 가라! 니가 뭐야?’ 이런 식으로 무시해서 그 사람이 회사에서 잘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지인의 친구는 여맹 규찰대에게 걸렸을 때 계속 마스크를 쓰라고 하니까 진짜 여맹원과 싸워서 때렸다. 그래서 단련대에 갔다.

B 씨 당시 다른 지역에서 코로나19에 누가 걸렸다는 소문 같은 건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걸린 사람이 없었다.
C 씨

당시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이후 식량이 부족해 굶어 죽은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대부분 시골 쪽이라고 했다.

알다시피 북한에서는 작년(2022년)에 코로나19가 지나갔다. 그걸 경험한 사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냥 감기처럼 지나갔단다.

 

13. 국내 현황

A 씨 나라에서는 북한에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걸 강조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자신감 있게 말 했던 게 코로나19 환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거였는데 그런 말 하면서 고맙다고 운 적이 있다. 그거 보고 사람들도 감동해서 울고 그랬다. 그때는 나라에서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방송에서 그렇게 말 하니까 우리도 북한에 코로나19 감염자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다.
B 씨 TV에서는 당시 북한에서는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이 없으니까 ‘마스크 쓰고 다니라’, ‘항상 위생규칙 지켜라’ 그런 내용만 나왔다. 몇 명이 걸리고 그런 내용은 없었고 방역 관련한 내용은 나왔다.
C 씨 코로나19는 없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까지만 해도 나라에서 코로나19는 없다고 했다.

 

14. 인식

A 씨

예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예전에, 에볼라와 조류 독감도 있었다. 그건 그냥 아예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엄청 심각하게 생각한다.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본다.

처음엔 코로나19를 엄청 무섭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가면서 별로 아니게 생각한 거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그런 영화까지 나오고 해서 계속 심각하게는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드라마인가 영화 같은 게 있었는데 코로나19 기간 중국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가는데 자원봉사를 하면서 사람들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거를 북한말 자막을 달아서 USB로 만들어 놓았고 사람들이 돌려 보면서 코로나19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영상은 ‘목란’ 표시가 있는, 나라가 허가한 영상이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 마인드가 그렇게 삶에 대한 의지나 욕심이 없다. ‘걸리면 죽고…’, ‘살아서 뭐 하냐’ 이런 식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루 잘 먹고 하루 잘 살자’ 이렇게 생각한다. 마스크도 병을 예방하기 위해 꼭 착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안 쓰고 싶어하지만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기 때문에 착용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기 위해 마스크를 의식적으로 착용하지 않나? 그런데 북한은 그게 아니고, 나라에서 해라고 하니까 착용하는 거다. 그래서 마스크 입 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로 담배 막 피고 다니고 그랬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하라니까 하는 거지 대충 쓰고 다녔다. 코로나19가 엄청 무서워서 마스크를 무조건 쓰고 다녀야겠다 생각하고 그러진 않았다.

C 씨 과거 북한의 다른 감염병 대응에 비해 코로나19 대응을 더 철저하게 했다. 사람들도 코로나19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왜냐하면, 물론 당시 코로나19가 북한에는 없었지만 중국, 미국 그런 나라의 코로나19 상황이 뉴스에서 방영되었다. 그때 몇만 명이 감염되었고, 몇 명이 죽었고 그러면서 나왔다. 그런 게 8시 보도로 뉴스 할 때마다 나왔다. 그 시간에 뉴스를 보면서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다는 걸 접했다 보니 코로나19가 심각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15. 대우

A 씨

사람들이 고달플 정도로 ‘빡세게’ 했다고 생각한다. 규찰대가 마스크 안 썼다고 사람들 막 세워놓고 그러기도 한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야 나이가 젊고 남자이니까 “마스크 쓰세요!” 이런 식으로만 말 하던데 여성들에게는 못 가게 세워 놓고 싫은 소리 엄청 하고 그러더라. 그런 상황에서는 사탕이라도 몇 알 주고 잘못했다고 하고 해야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구타를 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

뭐 근데 북한은 모든 것에서 다 인권이 없다. 뭐든지 강제로 다 하니까 그렇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인권의 의미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 코로나19 방역할 때 북한에서는 강제로 뭐든 다 하게 했는데, 그런데 한국도 강제로 하게는 했으니까, 비교하기도 어렵고 잘 모르겠다.

C 씨

좀 강압적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첨단이지 못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강제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약도 없고, 백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 한국처럼 장비가 엄청 있는 것도 아니다. 의사들이 착용하고 나갈 것도 없다. 인원 통제도 하고, 몇 명 모이지 못하게 하고, 학교나 유치원, 대학 몽땅 다 문을 닫았다. 아예 모이지를 못하게 했다. 야외에서도 4, 5명 모여 있는 거 보면 다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들이 특히 코로나19에 약하다고 해서 10살 미만 어린애들은 혼자 다니는 것도 못하게 했다. 부모가 같이 다니지 않으면 아예 밖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취약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어른들이야 마스크 착용하고 그냥 다녀도 어린 애들은 마스크 착용해도 못 나가게 했다. 내가 북한을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했다.

 

16. 경제, 식량 상황

A 씨

물가가 엄청 올랐다. 중국 물품이 제일 많이 올랐다. 내가 나오기 전에도 벌써 죽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더 충격을 받아서 탈북하게 되었다. 먹을 게 없으니까 집도 팔고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때는 자기가 가진 재산을 파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가전제품도 중고로 팔고 그랬다. 2021년 들어서 그런 모습이 더 심해졌다. 2019년보다 2021년에 먹는 게 확실히, 훨씬 더 힘들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쌀값은 안 올랐다. 나머지 물품, 중국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값이 올랐다.

나는 지금 왜 굶어 죽을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냐 하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걸 다 막아 놨다. 쌀값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걸 떠나서,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돈 버는 걸 막아 놨으니까 그게 문제인 것이다. 쓸 돈이 없으니 사람들이 다 나앉은 것이다. 수입이 있어야 지출이 되는 건데, 수입은 없고 계속 지출만 하다 보니까 문제인 거다. 나는 2021년보다 지금(2023년 3월)이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으로 이동하는 거, 중국하고만 풀리면 다 괜찮아질 거다. 일단 물가가 다 내려갈 거고, 바다로 나가서 일도 할 수 있을 거고. 지금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를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다 막았다.

B 씨

여기 한국에서는 북한을 꽃제비처럼 알고 있는데, 북한은 꽃제비가 아니다. 달러도 많고, 자원도 많다. 옛날에 온 탈북자들이나 그런 말을 한다. 과거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람들이 각성을 해서 지금은 북한에 죽 먹는 사람이 없다. 다 밥은 먹고 살고, 다 삼시세끼를 먹고 산다. 봉쇄를 했다고 해도, 유엔 제재이니 미국 제재이니 해도, 옛날 1990년대 고난의 행군과 달리 지금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 쓰지도 않는다. ‘저 새끼들, 또 시작되었구나’ 이런 식이다. 꿈쩍도 안 한다. 여기 한국이나 밖에서 북한에 경제 봉쇄를 해도 북한은 살 수 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발전한다. 지금 3년 넘게 북한이 봉쇄 중이지만 내적인 자원이 있다. 그리고 북한 시스템이라고 하는 게, 정말 국민들에게 배급을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군량미, 군수 물자가 있다. 큰 집이 무너져도 3년은 간다고 하지 않나?

북한은 잠재력이 있다. 한국에서는 북한이 정말 뭐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아니다. 지금도 아마 풍족하게 쌓아 놓고 먹지는 못해도 하루 세끼는 먹고 살 거다. 그리고 북한은 산을 다 벌거벗겨 놓지 않았나? 거기 소토지에, 농사를 지어먹는다. 그리고 강이면 강, 바다, 산 그런 곳에 자원이 많으니까 금, 버섯 그런 자원을 뜯어먹고 산다.

C 씨

장마당은 돌아갔다. 대신, 물건을 많이 가져다 놓고 팔던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물품이 배로 뛰다 하다 보니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쌀값은 그렇게 많이 안 올랐는데 설탕, 기름(식용유), 미원(조미료) 이런 게 거의 배로 뛰었다.

최근의 식량 상황은 여전히 어려울 것 같다. 굶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개는 안 하지만 분명히 있다. 점점 시간이 가면서 농사도 잘 안 되고 있다. 지금은 도시가 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잘 되나 못 되나 농사라도 나름 할 수가 있는데, 도시에서는 농사도 못 짓고 중국에서 일감을 받아와서 하던 수공업 같은 그런 소소한 일도 끊기니까 더 어려울 수 있다. 대신, 그 상황에 맞춰서 ‘다른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골 사람들은 농장일 외에도 개인적으로 밭을 일구는 것도 많다. 하지만 북한에서 나는 식량만으로는 모자라다. 북한은 늘 식량난이었다. 중국에서 쌀도 계속 수입하고 옥수수도 사다 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과연 그게 가능할지… 진짜 정 어려우면 전쟁예비물자가 있는데 늘 그거는 3년 분은 있으니까 군량미라도 내주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다.

 

바람에 나부끼는 인공기

여전한 우려와 의문

위의 탈북인 증언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코로나19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던 시기 북한은 코로나19 유입을 전면 차단하고자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이었다는 점이다. 당국은 방역을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고 기존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나름의 체계적인 방역을 진행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제한된 물자, 열악한 제반 시설, 첨단 기술 미비 등 북한이 마주해 온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고도의 기술적인 방역은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백신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의료 협력 제안을 거부하고 자력 대응을 고수한 행동은 코로나19 대응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면서 결코 주민들의 건강과 생명 보호라는 측면에서 결코 이롭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의 방식이 당국이 애초 의도한 대로 코로나19의 유입과 내부 확산을 일정 기간 늦췄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이 방역에 묻혀 다양한 형태의 인권 침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점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결국, 그 피해는 북한 주민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북한 당국이 하루빨리 국경을 개방하고 국제사회와의 교류를 재개해야 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 세계가 엔데믹으로 향해 가고 있는 현재, 북한은 당국의 ‘코로나19 위기 완전 해소’ 선포와 달리 여전히 코로나19 방역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거부한 채 자력갱생을 고수하는 당국의 방침이 과연 최선일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민영 언론,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독립적인 감시 체계의 부재로 인해 북한 당국의 발표 자료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부재하다. 당국을 제외하고는 아직 그 누구도 그동안 북한 내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직간접적 피해 규모에 대해 확인할 수 없기에, 신뢰도가 낮은 당국발 현황 자료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탈북인 증언 등 부차적인 자료에 의존해서 가늠만 해야 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2020년부터 지금까지의 북한의 코로나19 진행 상황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진 상태로 남아 있다.

 

 


1)증언 내용은 각각의 소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으나 일부는 다른 소주제와 내용이 겹치는 부분도 있다. 한국지부가 조사를 통해 직접 확보한 증언자의 경험 외에 출처가 제3자(증언자의 북한 내·외부 지인, 지인의 지인 등)로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내용은 포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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