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9일이었다. 경찰과 헌병, 공무원들이 들이닥쳐 보스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마을주민 8명은 훈 센 총리에게 항의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250km 떨어진 수도 프놈펜으로 가지만, 정부 관계자를 만나지 못하고 되려 체포되었다. 4명은 도망 가고, 3명은 곧 풀려났다. 단 한 명의 여성이었던 마이(Mai)는 주모자로 수감되고, 때는 임신 5개월이었다.
7명이 쓰는 감방에서 아기를 낳았고, 제대로 된 끼니도 먹지 못했지만, 아기는 태어났다. 열악한 상황에서 잘 자라주는 아기에게 ‘삼낭’, 캄보디아어로 행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8개월 후 돌아와보니 큰 아이들은 돈을 벌러 태국으로 갔고, 어린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던 마이네 가족은 이제 NGO나 이웃이 기부해준 쌀과 그날 구한 먹거리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보스 마을에서 나고 자란 마이에게 그 집은 삶이었다. 식구가 많았지만 굶지 않았고, 깨끗한 물, 통학할 수 있는 거리의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이 사라지고 그 날 이후 마이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도망간 남편의 행방은 묘연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집을 지켜주기는커녕 임산부인 마이를 감옥에 가뒀고, 농사 지을 땅이 없어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정책은 비단 캄보디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용산, 북아현동, 노점상, 서울역 노숙자 등 쓰라린 강제철거 및 강제퇴거의 기억이 우리에게도 있다. ‘외국’, ‘다른 사람’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존 레논(John Lennon)이 이메진(Imagine)에서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 본다. 온 세계를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을 상상해 본다” 라고 노래했듯, 우리는 하나의 대기를 나눠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
강제퇴거는 마이의 일만은 아니다.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킬 수 있도록 캄보디아 정부에 요구하자.
마이는 훈 센 총리를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가 쓴 탄원서는 총리에게 전해질 것이다.
지금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