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이주노동자들의 고향에서 만난 한국
네팔 이주노동자의 날 행사를 참여하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네팔을 찾는다. 대개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산으로 간다. 눈 덮인 산을 오르며 한국에는 없는 4000미터, 5000미터의 산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한다. 그리고는 내려와 포카라와 카트만두의 여행자 거리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이내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네팔에서 거대한 자연을 보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소박한 현지인들을 만나 때묻지 않은 순수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일상적인 정전과 최악의 도로사정을 경험하고선 한국에서 태어나 다행이라고 감사하기도 한다.
수많은 네팔인들도 한국을 찾는다.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돈을 모아 한국에 온다. 한국에서는 차별과 하대를 받으며 눈 딱 감고 몇 년간 돈을 번다. 한국의 빌딩들과 패션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별다른 여가나 관광 없이 젊음을 바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으로만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젊음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다녀온다. 그리고 각국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네팔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네팔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장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는 나는 그들의 고향에서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나. 이주노동자의 날에 맞춰서 네팔의 카트만두를 찾아갔다.
이주노동자의 날의 다른 풍경
루페쉬는 꼬박 이틀을 걸려서 고향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이제 외국으로 가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국외로 가기 위한 서류들에 도장을 받기 위해서이다. 비슷한 이유로 찾아온 젊은이들이 바글거리는 이곳은 네팔의 국외노동부 앞, 이주노동에 필요한 허가도장을 받는 곳이다.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인 12월 18일, 네팔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트리부완 공항 근처에 있는 네팔 국외노동부 건물 앞에서 앰네스티 네팔지부의 캠페인이 있었다.

카트만두의 트리부완 공항 근처에 있는 국외고용부 건물 앞의 캠페인 모습. 피켓과 배너를 들고 서 있다. 왼쪽에 있는 부스에서는 서명을 받고 있다.오른 편에 보이는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네팔지부 디렉터인 라메쉬.
건물 바로 앞. 거리캠페인의 대상자는 정부와 이주노동을 떠나려는 사람들이다. 마이크를 든 사람이 정부와 국회에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라고 요구한다. 이주노동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겐 이주노동자가 겪는 어려움과 그들의 권리에 대해서 얘기한다. 옆에서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앰네스티 로고가 찍힌 피켓과 배너를 들고 있다. 한쪽 켠에 마련된 테이블에선 사람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여행 중에 배운 네팔어로 내 이름을 써서 서명 하나를 보탰다. 이주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방법이 담긴 가이드북도 나눠주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두껍지는 않았지만 실용적으로 보였다. 캠페인은 소박했으나 이주노동을 가려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많은 만큼 서명과 가이드북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김희진 전 사무국장님을 잘 아신다는 라메쉬 네팔지부 사무국장님이 한국 앰네스티 회원이라는 나를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이 밖에도 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아 여기저기서 행사나 집회가 있었다. 전날엔 고속버스 터미널 광장에서 있었던 안전이주 캠페인에서 이주노동을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을 그린 마당극을 구경했다. 18일 아침엔 시청 앞 공원에서 출발한 이주노동자의 날 행진에 참여했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노조와 인권단체들이 시내 곳곳을 걸었다. 흥미로운 건 한국에서는 시민단체와 대립하기 십상인 정부관계자들, 그리고 이주노동자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곤 하는 취업알선업체도 행사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다. 같은 날 오후 공항에서는 이주노동을 다녀온 여성들의 단체인 포라키에서 이주노동을 하기 위해 출국하는 사람들과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홍보하는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이 밖에도 이주노동자의 날을 전후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캠페인, 증언대회, 마당극, 세미나 등의 행사가 벌어진다. 네팔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단편적인 느낌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운동의 위상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봤지만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아 몇 개의 작은 행사가 지방에서 있었다는 기사만 몇 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대선 전날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이주노동을 하고 돌아온 여성들이 만든 단체인 포라키에서 이주노동자의 날에 공항에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이주노동을 가려고 출국하거나 이주노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흰 천을 걸어주는 캠페인이다. 흰 천은 네팔말로 ‘까딱’이라고 하는데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안전과 행운을 빌어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까딱을 걸어주며 무슨 국외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묻기도 하고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권리나 법들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공항에서 한참 귀국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각기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오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다른게 신기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네팔의 이주노동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는 차별받는 집단이다. 후진국에서 왔고 최하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제적 약자이자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인종적 소수자로 여겨진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얘기할 때면 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발하며 이들도 인간임을 주장할 때가 많다. 그리고 감싸 안아야 할 존재로 이주노동자들을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데 인권침해를 당하는 피해자로 나온다.
하지만 네팔에선 좀 다르다. 이주노동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이 다양하다. 보다 잘 살거나 학력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보다 선진국으로 간다. 가난하고 못 배운, 지방 출신의 사람들은 말레이시아나 중동 등 보다 경제수준이 낮고 작업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간다. 이주노동을 하고 와서 번 돈을 밑천 삼아 더 선진국으로 이주노동을 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어느 나라에서 일을 하고 왔냐에 따라서 번 돈이 다르고 갖고 있는 문화도 다르며 겪은 문제들도 다르다. 이주노동자들이 국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네팔 GDP의 25%나 되는 데 주요 산업인 농업 다음으로 많은 수치이다. 그만큼 이주노동과 이주노동자의 위상은 한국에서와 다르다. 이주노동은 소수자의 문제로만 여겨지지 않으며 이를 둘러싸고 문화, 경제, 계층, 인권 등 숱한 문제들이 얽히고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낸다.
적어도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은 최근들어 많이 좋아진게 사실이다. 고용허가제 이후 한국정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온다. 한국어도 배워서 오고 정부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브로커의 사기도 거의 줄었다. 이주노동의 과정에서 인권침해의 여지가 많이 줄었다. 물론 한국 말고도 미국, 유럽 등의 서구와 일본처럼 경제수준이 높은 곳부터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 등 중동국가들 그리고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말레이시아까지 네팔의 이주노동자들이 가는 국가는 다양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수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브로커들이 계약금을 올려받거나 월급이나 직종을 속여서 외국으로 보내고 거기서도 여러 가지 고용주들의 횡포로 인권침해를 겪지만 정부의 감시와 보호는 약하다. 네팔에서 이주노동을 가는 나라들이 다양한 만큼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의 출신국가도 다양하다. 출신국가도 다양하고 그나라의 문화와 경제사정도 다르다. 그 나라 안에서의 그들의 형편도 다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사정도 다양하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이주노동자의 이주노동 이후
이주노동자는 이주민과 다르다. 이주민이 평생을 이주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주노동자는 경제적 사정에 의해 일정한 기간을 살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이주민을 대하는 것과 이주노동자를 다르게 대한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일회용품’으로 대하는 정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의 다양한 차이와 귀국전후의 서로가 갖는 관계에 무관심하다면 그러한 비판은 우리에게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젊어서 한달 하는 배낭여행에도 인생이 바뀐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수년간의 외국생활을 경험하고 돌아간 사람들은 어떠할까.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접근은 분명 달라야 하지만 서로의 나라 사이에서 이들이 끼치는 영향과 교류는 계속해서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네팔에는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간 사람들이 수만명이 살아가고 있고 이는 분명 한국와 네팔 양 국가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네팔에서 나는 이런 변화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이주노동 경험과 강제추방 이후의 삶에 대해 샤말 타파와 긴 얘기를 나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강제추방 이후에도 계속 한국과 관계를 맺으며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땅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네팔의 한 식당에서 네팔의 가장 보편적인 음식인 달밧을 함께 먹고 있는 모습.
샤말 타파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던 그는 한국에서 10년간 살았다. 처음에는 돈을 벌러 왔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인권에 눈을 뜬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가 됐다. 이주노조 활동을 하던 그는 정부에 의해 반인권적으로 기습체포됐고 여러 가지 사정에도 불구하고 긴급하게 추방당했다. 그는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한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네팔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네팔의 노총에서 이주노동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고 최근에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고 온 네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센미고(SCENEMIGWO, Solidarity CEnter of NEpalese MIGrant Workers)라는 단체를 준비하고 다양한 나라에서 이주노동을 하고 온 사람들과 함께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경제적 기반이 없는 여성들에게 기술과 소자본을 제공하는 협동조합을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의 몇몇 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한국과 네팔의 교류의 중간에 그가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행진에 ‘센미고’ 단체의 배너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배너를 들고 있는 안경쓴 남성은 데이빗씨로 한국에서 10년이 넘게 일을 하고 오셨다. 한국사람과 너무 유사한 생김새를 갖고 계셔서 처음에는 한국인인줄 알고 인사를 했다가 잠시 뒤 혹시 네팔분이신지 여쭤보니 그렇다며 허허 웃으셨다. 아직 한국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막걸리 공장 사업을 구상중이며 틈틈이 센미고 등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샤말 뿐 아니라 한국에서 일하고 온 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한국과 관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행자거리인 타멜에서 여행사를 하는 산지브씨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을 맞는다. 처음 봤을 때 한국의 흔한 아저씨인줄 착각할 만큼 한국사람과 닮은 데이빗 씨는 막걸리 공장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청바지 공장에서 일한 수많은 사람들이 네팔에 와서 청바지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청바지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외국에서의 거주 경험은 네팔에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국의 노래들을 듣고, 한국의 음식들을 찾는다. 네팔의 슈퍼에서 네팔회사가 만든 김치라면이 진열돼 있고 한국에서 흔히 보는 수면바지도 네팔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경제수준으로는 한참 낮은 네팔에서 오히려 더 친숙한 서구나 한국 일본 등의 패션이나 음식 등의 문화를 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인권보장을 넘어서
인권은 최소한이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용허가제나 노동법등이 지켜지지 않는 인권침해가 많이 벌어지고 있는것도 엄연한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 법들을 잘 지켜지게 하고 법을 손질해 사각지대를 없애가는 것도, 그래서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지게 하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 중심이 아닌 고용하는 사람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고용허가제’라는 제도가 전제하고 있는 것도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이주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인권침해를 당해도 꼼짝할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주노동을 오는 근본적인 원인인 국가간의, 그들 국가 안에서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한국어 학원. 한국의 산업인력공단에서 네팔에 쿼터를 공시하면 한국어 시험을 보고 그 성적을 기준으로 한국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정해진다.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서 한국에 가는 것은 아니며 2010년에 한국어 시험을 합격했지만 한국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한국어 시험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한국어 시험이 있다고 공고가 나면 시내에 이런 학원이 수백곳이 생겨나서 단기간에 속성으로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한다. 학원비는 꽤 비싸고 수도 카트만두에만있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어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에서 관리를 하면서 한국으로 가는 비용이 낮아지고 안전해졌다. 과거에 브로커를 통해서 한국에 일하러 가는 경우엔 비용은 더 많이 들었지만 일단 돈을 꿔서 브로커에게 주면 한국으로 일하러 갈 수 있었던 데 반해 이제는 돈을 들여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서 합격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한국으로 가는 문턱은 더 높아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다.
네팔에서 여행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국은 너무도 높아서 감히 넘볼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한국에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한국어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번듯한 가게를 세 개나 갖고 있었지만 보다 많은 돈을 벌러 가길 원했다. 어떤 여고생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연예인을 대하듯 했다. 천년이 넘은 신전 앞에서 강남스타일을 부르는 아이들도 기억에 남는다. 시골 마을의 어느 버스기사 아저씨는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버스를 사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샤말처럼 한국에서 인권이나 운동에 눈을 뜨고 와서 네팔에서 계속해서 운동을 하기도 한다.‘이주노동자’라는 이미지 속에 이렇듯 다양한 사연과 각기 다른 처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법, 인권, 제도, 그리고 불평등과 문화나 경제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간의 차이와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생각들, 정체성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이란 어떤것일까. 그것은 마치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면서도 정작 사람들이 표현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이러한 노력의 시작일 것이다. 네팔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얗게 눈이 쌓인 산만은 아니고 네팔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마음의 평화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