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년 11월에 쓰여졌습니다.
Human Rights X Sports
공 하나에 담기는 질문들 : 축구로 인권 보기
축구는 단일 종목으로서 단연 지구 최대, 최고의 스포츠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축구를 하고, 보고, 즐기고 있습니다. 축구의 인기와 영향력을 다른 스포츠가 대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축구를 매력적으로 만들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표현도 적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건강한 신체와 신체가 격렬하게 부딪히고, 커다란 공이 대포알처럼 날아가 골네트를 가르는 모습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축구의 규칙은 아주 단순하지요. 상당히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을 가진 야구와 비교해보면 축구가 가진 단순함의 미학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축구의 낮은 진입장벽은, 고가의 장비를 갖추지 않고도 공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는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도시의 빈민가 뒷골목에서든, 해변에서든,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디서든 공을 찹니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디디에 드록바1), 호나우딩요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됩니다.
축구가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민족주의(Nationalism)적 성격을 띄기 때문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무력분쟁과 국지적인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국가 대 국가 간의 전면전은 현대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거기엔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인류 공통의 보편적 공감대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적 가치가 여전히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요.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과 경쟁심리, 그리고 인종혐오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심각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축구는 진짜 전쟁이 아닌 일종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중국인, 일본인이 아무리 미워도 중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축구장에서 “한일전만큼은 절대 지지 마라”고 악다구니를 쓰거나 중국축구를 조롱하는 것은 가능하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대표 축구 대항전은 무척 많은 전쟁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1명이나 되는 선수들이 가슴에 국기를 단 유니폼을 입고 대형국기를 앞세우고 입장해서 경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국가(國歌)를 합창하는 의식 자체가 이미 전투를 앞둔 군인들처럼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게다가 많은 국가(國家)들의 국가(國歌)가 군가(軍歌)에서 비롯되었지요) 한국 대표팀 선수들을 국내 언론에서는 흔히 ‘태극전사’라고 부르지요. 일본은 ‘사무라이 재팬’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나라들은 또 어떤가요? 전차군단, 무적함대, 아주리군단 등 각 나라 대표팀을 부르는 애칭들은 모두 호전적인 어떤 것들에 기원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유독 축구는 정치적인 무대가 되어왔고, 인종혐오에 쉽게 노출되었습니다. FIFA가 경기장에서 정치적 세레머니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과 인종혐오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축구가 그만큼 많이 국가주의와 인종혐오의 장으로서 이용되어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국의 축구 대표팀 선수가 ‘순혈’이 아닌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2002년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팽(Jean Marie Le Pen)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선과 월드컵을 앞두고 지단을 비롯한 대표팀 내의 흑인, 아랍계 선수들을 맹비난 했습니다. ‘순수 프랑스인’도 아닌 자들이 대표팀에 뽑혀서 국가도 부를줄 모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는다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다인종 다문화 출신의 선수들로 구성된 프랑스 선수들 중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제창을 거부하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한 대표팀의 일원이었던 크리스티앙 카랑뵈(Christian Karembeu)도 그런 선수였습니다.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출신인 그의 증조부 윌리 카랑뵈가 1930년대 세계식민지박람회에서 ‘식인종들’이라는 이름으로 ‘전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와 2000년대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의 뿌리는 포르투갈(피레스) 세네갈(비에이라) 아르헨티나(트레제게) 가나(드사이) 과들루프(앙리, 윌토르, 튀랑) 콩고(마케렐레) 등으로 굉장히 다채롭다.
지네딘 지단은 2002년 프랑스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서 그 비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알제리계 이민 2세이자 무슬림으로서 그는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aillaise)’를 거부해 제창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라운드 안밖으로 과묵한 선수로 유명한데, 르팽의 인종차별적 발언에는 성명서를 내고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지단은 여전히 프랑스인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인으로서,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끈 국민적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한 뒤의 대표팀은 여전히 국민전선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단과 마찬가지로 알제리계인 카림 벤제마가 국가제창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퇴출시키라는 것이지요.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국가 제창이 아니라 팀 전체의 결속이다. 나는 프랑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뭐라해선 안될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생각이 중요하지 입모양이 중요한가”
독일 역시 뿌리 깊은 순혈주의와 인종주의가 축구 대표팀에도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인종차별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지요.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고집스럽게 ‘순수 독일인’만 국가대표로 발탁해 왔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90년대 후반에는 ‘녹슨 전차’라는 비아냥까지 들으며 추락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다 2002 월드컵에서 가나 출신 ‘아사모아’를 시작으로 출신과 인종의 구분 없이 실력으로 선수를 뽑게 됩니다.
메수트 외질(Mesut Özil)은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님은 터키인이며 터키음식을 먹고 알라에 예배하는 무슬림입니다. 독일내 터키인에 대한 차별과 갈등의 역사는 뿌리 깊습니다. 외질이 터키인이라 하여 차별받고 따돌림 당해서 축구의 꿈을 접었다면 독일과 전 세계 축구팬들은 지금의 뛰어난 축구선수를 볼 수 없었겠지요. 독일에서 주로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터키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무척 심해서 제2의 유태인 차별에 비유될 정도였지만, 외질이 독일 대표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으며 이러한 터키인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다문화 현상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코 앞에 다가온 현실입니다. 이제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뛰어난 축구선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나라 축구선수가 국가대항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가제창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맹목적인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자 개인의 신념으로서 포용할 수 있을까요? 겉모습이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 ‘국가대표’로 뽑힌다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세계인권선언
제 13조
1. 모든 사람은 각국의 경계 내에서 자유롭게 이전하고 거주할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이나 다른 나라를 떠나거나 자국에 돌아갈 권리를 가진다.
제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 단독 또는 타인과 공동하여 공적 또는 사적으로 포교, 행사, 예배 및 의식을 통하여 종교나 신념을 표명할 자유를 포함한다.
제 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자유를 포함하며, 또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국경을 넘거나 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받고 전할 자유를 포함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기 위해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을 적시해놓은 세계인권선언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1948.12.10)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서로 싸우다간 모두 다 죽고 말겠다는 위기감 때문에 함께 모여 좌우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만들어낸 합의가 ‘인권’입니다.
오늘날 유럽 축구리그에서는 한 팀에 인종과 국적 등의 출신에 관계없이 다양한 선수들이 오로지 축구 하나로 뭉쳐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선수들이 골을 넣고 한데 모여 기뻐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불과 70년 전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서로 목숨을 빼앗아야만 했던 관계였죠.
프랑스 선수들은 경기 중 심장마비로 숨진 카메룬의 비비앙 푀를 추모하는 세레머니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진짜 ‘축구’만 있는 경기에서는 전쟁도, 식민지배도, 인종도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사람은 끊임없이 이동해 다녔습니다. 자유로운 거주 이전의 자유는 세계인권선언에서 명시하는 권리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찾고자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들을 ‘불법’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대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인간의 본성에 따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 ‘유대인이자 독일인으로 태어났고 스위스인으로 살았으며 미국인으로 눈감은’2) 아인슈타인
한국인 축구선수가 인종차별을 당하면 분노하고, 한국계가 외국 공직에 진출하면 자랑스러워하면서, 정작 우리 안의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요?
축구장에서 부르는 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언제나 개인의 신념과 자유보다 우선해도 좋은 걸까요?
한 사람을 두고, 그의 인종이 어떤지, 이주민인지 아닌지가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이렇게 많은 질문들이, 공 하나에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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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을 멈춘 사나이, 디디에 드록바
2)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EBS 지식채널e ‘where are you fr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