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스릴러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곧잘 공포감으로 승화되곤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릴러물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낯선’ 것에 대한 불안감을 그 주제로 삼곤 하죠.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으로 여겼던 것이 ‘어떤 계기’로 인해 갑자기 낯설어 보이거나, 줄곧 옳다고 믿어온 신념이 깨어지는 순간의 괴리에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막연한 미지로부터의 두려움이 아닌, 그동안 내가 행해왔고, 그리고 실재한다고 믿었었고, 더불어 평범하다고 여겼던 무언가가,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의 불안, 그리고 공포인 셈이죠.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바로 그러한 긴장감과 공포감을 잘 포착하고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공간의 표현에서도 기존 스릴러의 전형을 고수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끼는 순간과 장소를 스릴러의 무대로 삼았습니다.
안락함 속에 잠재된 불안감과 두려움.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공포와는 또 다른 차원의, 마치 실재하는 공포감으로 여겨지게끔 하였죠.
스릴러에 대한 관점의 변화. 아니, 어쩌면 ‘히치콕적’ 스릴러물이 가져다주는 공포감이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가 무탈하게 여기는 일상에 내재된 허점과 불안정함을 여실히 드러내어 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01. Perfect Blue (1997)
누군가는 이 작품을 두고서 ‘앨프리드 히치콕이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면 이와 같았을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1997년에 개봉한 작품 ‘퍼펙트 블루 (1997)’는 재패니메이션은 물론, 주류 영화계에도 큰 영향을 행사하는 작품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특히 작중인물의 섬세한 심리상태 표현과 함께, 현실과 몽상을 넘나드는 장면전환이 백미인 작품이죠.
이 작품은 외연으로만 훑어보면 ‘스토킹’을 주제로 한, 다소 뻔한 주제의 스릴러물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돌 여가수가 나오고, 그녀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스토커가 나오고 또…
어쨌거나,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는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몇몇 사건, 사고들은 당시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허구이지만 허구라고만은 볼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존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연출자인 사토시 콘 감독이 강렬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청자들에게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퍼펙트 블루’의 진정한 공포가 시작되는 지점은, 작품 속 주인공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 스크린 안에만 머물지 않고 청자에게, 즉 당신에게 날아드는 순간입니다. 즉, 그 지점에서 진정 스릴러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 물음이란 바로,
‘아나타 다레나노? (あなた 誰なの?)’
(‘당신은 누구예요?’)
02. 당신은 누구예요?
‘당신은 누구예요?’라는 대사가 이처럼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네요.
게다가 ‘너 누구냐?’라는 질문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던진다는 것이 살짝 묘한 감상에 젖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 누구세요?’라고 소리 내어 말한다는 것, 그 자체로도 어쩐지 오싹하지 않나요?
이 작품이 주는 공포감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죠.
타인의 요구와 기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사람. 과연 이것이 영화 속 ‘아이돌’에만 국한된 이야기일는지요?
좋아하는 대상에게 횡포에 가까운 기대치를 걸고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면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일그러진 ‘스토커’의 모습을, 실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늘 목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누군가에 대한 동경을 넘어 자신을 부정하고 타자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 땅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타인으로부터 회복하려는 가련한 모습이, 이미 우리 주변에 만연한지 오래되진 않았는지요?
타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개인, 타인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려고 하는 누군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고픈 사람까지.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 속 이야기들은 때론 ‘사건, 사고’라는 이름으로 뉴스가 되기도 합니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죠,
‘정말 바보 같은 사람들이야’
자, 저 바보 같음으로부터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일상이 스릴러가 되기까지 필요한 요소는 ‘자각’ 뿐입니다.
바로 내가 그 ‘바보 같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각 말이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보다 더 심하게 노예가 된 사람은 없다.” – 괴테
03. 누가 당신의 몸을 통제하는가
‘노예’라는 표현을 그저 옛 시대상을 대변하는 단어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수 있습니다.
‘노예’란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부정당하고, 더불어 스스로도 인간성을 부정한 이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 자신도 다른 누군가와 같은 ‘인간’이라는 자각과 함께, ‘나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전까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유지됐던 ‘평화로운 일상’은 깨어짐과 동시에,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다른 자각 없이 보낸 나날들은 어쩌면 자신을 부정당한, 그리고 스스로를 부정한 나날의 연속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자아를 잃고 타인의 통제를 받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옛날의 ‘노예’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최근 국제앰네스티에서 ‘나의 몸, 나의 권리 My Body My Rights(MBMR)’ 캠페인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슬로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당신의 몸을 통제하는가?’
누가 당신의 몸을 통제하는가.
이 물음은 겉으로 보기엔 ‘누가’ 내 몸을 통제하는가, 즉 통제하려는 주체에 대한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주체는 하나가 아닌 둘입니다. 바로 통제하려는 ‘누가’와 통제당하는 ‘당신’이죠.
누가 당신의 몸을 통제합니까? 우리는 이미 그 ‘누군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제하려는 불합리한 사회적 통념, 권력, 권위주의와의 싸움을 이미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도 답변도 통제하는 ‘누군가’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질문에 대한 반쪽짜리 답변일 뿐입니다. 남은 반쪽, 즉 ‘당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합니다.
만약 같은 질문을 사토시 콘 감독이 던졌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지 않았을까요?
‘남에게 통제당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우리는, 나는, 왜 통제를 당하는 것일까요? 왜 통제를 당해 왔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제서야 그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비로소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요.
04. 내가 ‘진짜’가 되기까지
90년대 일본의 세태를 섬뜩한 스릴러로 그려낸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는 영화 속에서나 그려질 법한 스릴러가 이미 현실 속에 팽배해 있음을 반영해낸 작품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현상을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질문을 함께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고찰인 셈이죠.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없고
내가 바라는 삶을 남을 통해 이루려 하고
내가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
오늘날, 자아를 잊은 사람들이 모여 빚어내는 핏빛 비극은 결코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서 ‘당신은 누구예요?’라는 자신에 대한 물음이, 차분한 어조로 시작되어 점차 불안감과 떨림으로 고조되다 이내, 절규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되어가는 처절한 과정은 마치, 노예처럼 자각 없이 타의에 통제당해온 한 사람이 자아를 발견하고 찾아 나가는 험난한 과정,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살아가길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그 옛날 노예들이 그 시대에, 노예로서 살아가길 선택한 적이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고서 사회적 통념에 의해 조종당하듯 살아가면서 ‘자유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순간, 현실은 어느새 무서운 스릴러가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어 잔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미 스릴러 속 주인공이 된 당신, 부디 해피엔딩이 함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