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마래이. 가지 마래이. 나를 두고 가지 마래이……” 지난 11일 새벽 6시에 밀양에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찌감치 전날 이른 오후 기차에 올랐다. 일흔 아홉의 덕촌 할매가 함께 127번 움막을 지킨 현풍댁을 다독이며 했다던 이 말이 가슴에서 요동을 친다.
“아버님예, 오늘도 전투나갑니더”라며 방에 시아버지 사진을 걸어놓고 매일매일 ‘전투’를 나갔다던 덕촌 할매. 결국 하다하다 안되서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127번 움막에 올랐다. 500년 조상들이 대대로 묻힌 이 산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시아버지가 ‘고향을 지키라’고 했던 뜻을 저 버리면 차마 죽어서 뵐 낯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덕촌 할매에게 ‘얼마면 되겠냐’고 묻는 한전과 국가, 그 앞에서 무너지기를 수십 번, 수백 번. 그래도 765kV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를 떡 하니 차고 앉은 움막 하나가 비빌 언덕이 됐다. 이 움막이 있으니 싸움이 외롭지 않았다. 연대하는 이들이 와서 말벗이 되었고, 침도 놓아주고, 힘이 되어 주었다.
“내 잠이 안 온다. 이래 사람이 많으니 꼭 잔치하는 거 같다”
경찰이 막고 있는 통행제한선을 지나 127번과 129번 움막으로 오르는 장동움막에서 트럭을 얻어 타고, 기자 한 명, 할매 두 명과 함께 짐칸에서 덜컹거리며 산길을 올랐다. 트럭이 127번 움막에 도착하자 덕촌 할매가 버선발로 뛰어 나와 트럭에 함께 타고 온 할매들을 붙들고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덕촌 할매의 품에 안긴 할매들은 “그래도 와야지 안되겠나.” 할매들은 이 한 마디로 한 동안 움막에 걸음 하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덮는다.
하나, 둘 마을에서 할매, 할배들이 마법처럼 127번 움막으로 모여들고 사람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하니 덕촌 할매가 담요를 덮고 앉아 덧버선을 신은 발을 까딱이며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 잠이 안 온다. 이래 사람이 많으니 꼭 잔치하는 거 같다. 내 참 좋다.” 그 깊은 두려움과 슬픔을 감히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 하룻밤이 무척이나 길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카톡이 계속 깜빡인다. 6월 10일 있었던 청와대 인근 집회에 인권침해감시를 간 이들이다. 누군가는 경찰에 연행되었고, 누군가는 경찰에게 밀려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이 내일의 밀양과 겹쳐 속이 아프다.
세 시가 됐다. 알람이 여기저기서 울린다. 혹시 예정된 시각 보다 훨씬 더 빨리 경찰이 들어올 수 있어 미리 일어나자고 약속한 시각이다. 다들 기지개를 펴며 자리를 정리하는 데 갑자기 할매들이 바빠졌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산속 깊은 127번 움막에 동래댁 할머니의 진두지휘로 김치찌개와 각종 김치의 성찬이 차려졌다. “오늘 하루 종일 밥도 못 먹는다. 지금 먹어놔라.” 태어나서 가장 이른 아침 식사를 꾸역꾸역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새벽 네 시가 지나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할매들과 수녀님은 목과 허리에 묶었던 쇠사슬을 풀고 잠시 긴장을 내려 놓는다. 날이 서서히 밝아지던 6시 30분 즈음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척에 있는 129번 움막에서 철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129번 움막에서 시작된 비명소리가 127번 움막에 전해지자 덕촌 할매가 몸에 맨 쇠사슬을 잡고 오열한다. “억울해서 우예 살꼬. 억울해서 우예 살꼬. 지키면 될 줄 알았더마는. 저놈들한테 뜯겨서 우예 살꼬. 내 공사는 다 무너져뿌따. 내 공사는 다 무너져뿌따.” 할매들과 연대하러 온 127번 움막 지킴이들의 낯빛도 초초해졌다.
비명 소리가 멈추었다. 129번 움막 밖으로 할매, 할배들이 모두 끌려나왔다는 말이다. ‘이제 127번이다…’
한참을 지나도 경찰이 오지 않았다. 들려오는 차 소리와 사람소리에 긴장했다 풀기를 여러 번. 8시 50분이 되자 127번 아래 움막에 무전기를 든 경찰과 노란 옷에 안전모를 쓴 시청 공무원들이 보였다. 순식간에 경찰 병력이 까맣게 127번 움막으로 올라오는 길을 가득 메웠다. 시청 공무원이 행정대집행 영장을 읽는다.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덕촌 할매의 하늘이 무너지던 날
행정대집행 영장을 읽은 지 1-2분도 채 되지 않아 마치 비밀리에 작전을 진행하듯이 움막 뒤편으로 경찰이 들이 닥쳤다. 마치 군사작전 같다. 움막 뒤편을 포함해 움막의 4면으로 철조망을 넘어 들어와 절단기와 가위를 들고 움막해체작업이 시작됐다. 가로세로 5미터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에 경찰과 기자, 연대자가 뒤엉켜 할매들의 목과 허리에 맨 쇠사슬을 끊기 위해 육중한 절단기가 농성자들의 손과 다리 위, 머리 위, 그리고 절단 작업을 하는 경찰들 사이로 오갔다. 쇠사슬을 묶은 이들이 고령의 노인들이라거나 여성이라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로지 쇠사슬 절단 작업에 몰두한 경찰은 한 여성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눌러가며 지지대 삼아 쇠사슬을 절단했다. 쇠사슬이 이리 땡겨지고 처리 채이며 허리가 고꾸라졌다.
주민들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변호사도, 국회의원 보좌관도, 심지어 기자조차도 경찰에게 짐짝 취급을 당했다. “안전”을 위해 움막 밖으로 강제로 ‘이동조치’를 당한 이들 역시 컨베이어 벨트 위의 짐짝처럼 옆 경찰로 넘겨 졌다.
그렇게 움막이 비워지고 덕촌 할매를 시작으로 한 명씩 한 명씩 할매들이 밖으로 실려나왔다. 이미 비닐이 찢겨져 움막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난 사이사이로 퍼런 하늘이 서럽게 드러났다. 딱 25분 걸렸다. 10년이 넘는 싸움 끝에 일흔 아홉의 나이에 왜 쇠사슬을 목에 걸었냐고 경찰을 앞세운 국가는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덕촌 할매는 그저 철거해야 할 ‘불법 구조물’일 뿐이었다. 덕촌 할매 위로 하늘이 내려 앉았다. 덕촌 할매의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은 그 날, 너무도 서러웠다. 인간의 존엄도 함께 무너졌다. 127번 움막에 이어 12시 15분 115번 움막, 4시 5분 101번 움막 차례차례 하나하나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