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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이 곧 평화였다’ 고토 켄지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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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꾹 참는다. 화가 나면 고함지르는 것으로 끝. 그것은 기도에 가깝다. 증오는 사람의 일이 아니며 심판은 신의 영역.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은 아랍의 형제들이었다.”

이슬람 무장단체 IS 일본인 희생자 고토 켄지가 2010년 남긴 트위터 글은 깊은 울림을 주며 일본인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나는 켄지다(I am Kenji)’라는 문구가 SNS상에서 확산됐고, 고인의 동료들이 시작한 페이스북 커뮤니티에는 고인을 향한 애도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로는 시에라리온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저서 「다이아몬드보다 평화를 원한다」와 아프가니스탄 소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육을 받게 되는 내용의 「만약 학교에 갈 수 있다면」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고토 켄지는 96년부터 분쟁지역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전쟁에서 교육은커녕 소년병이 되기를 강요 받는 아이들의 삶을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실종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영상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시리아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모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으니 시리아 사람에겐 어떤 책임도 지우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약자의 삶을 알리고자 치열하게 현장을 누볐던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또 다른 폭력과 억압의 원인이 될까 두려워한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지난해 10월 고토 켄지는 먼저 참수당한 또다른 일본인 유카와 하루나가 IS에 피랍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유카와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바로 짐을 꾸렸습니다. 일본 정부는 출국에 앞서 3차례 시리아여행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아랍어에 능통하며,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 탄탄한 인맥도 형성하고 있던 그는 IS 점령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고, IS와의 교섭을 통해 유카와 하루나를 구출하려는 목적 하에 시리아로 떠났습니다.

고토 켄지는 평소 아이들의 눈을 통해 전쟁 참상을 알리는데 힘써왔고 마지막까지 내전으로 고통 받는 시리아 주민들 취재에 매달렸습니다. 시리아 분쟁에 관련된 세력 거의 전부가 나이 어린 소년병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으로 이미 380만명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났으며, 피난 갈 환경조차 허락되지 않은 주민들, 특히 아이들은 불법적인 물건의 운송이나 성적인 착취를 강요당하는 것에서 나아가 소년병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사실 2월 12일 오늘은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평화와 분쟁지역 아이들의 인권보호를 상징하는 ‘세계 소년병 반대의 날’이기도 합니다.

고토 켄지의 죽음이 알려진 후 아내 린코는 프리랜서 언론인 지원단체 로리펙트러스트(Rory Peck Trust)를 통해 “분쟁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전하기 위해 힘쓴 남편의 삶이 자랑스럽다”라고 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시도 준코도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늦었지만, 고토 켄지의 명복을 빕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전하고자 했던 아동 인권과 평화의 메세지를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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