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수요일 오후 8시, 필름포럼에서는 ‘한국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인권상황을 다룬 보고서-감옥이 되어버린 삶’ 발간을 기념하여 <앰네스티 수요극장> 여덟번째 영화 ‘얼음강(Ice River, 2012)‘ 이 진행되었습니다. 보고서를 직접 조사하고 작성한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 히로카 쇼지가 초대한 이번 행사에는 ‘조금 더 특별한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많은 분들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얼음강’ 의 각본 및 연출을 맡은 민용근감독님과의 대화, 히로카쇼지 조사관&민용근감독님에게 묻는 질의응답 시간, 앰네스티人의 양심응원-인증샷 액션을 통해 좀 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많은 분들 가운데 윤지애 후원회원님께서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얼마나 평범한 청년들인지를, 그가 내 아들, 연인, 남편,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특유한 안보상황, 대체복무제 도입 시 발생할 병력자원의 손실 문제, 병역 거부가 진정한 양심에 의한 것인지 여부에 대한 심사의 곤란성, 사회적 여론이 비판적인 상태에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경우 사회 통합을 저해하여 국가 전체의 역량에 심각한 손상을 가할 우려가 있는 점 (중략) 등을 고려할 때 대체복무제를 허용하더라도 국가안보와 병역의무의 형평성이란 중대한 공익의 달성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판단을 쉽사리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은 채 형사처벌 규정만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 법률조항이 최소 침해의 원칙에 반한다거나 법익균형성을 상실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2011년 8월 30일 선고된 헌법재판소의 다수의견 중 일부이다. 어려운 문장이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너도 나도 군대를 안 가려고 할 건데, 누가 진짜 양심 때문이고 누가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인지 밝힐 방법이 없고, 그러면 군인이 줄어들어 국방이 약해질 테니, 남북 분단 상황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 처벌하더라도 양심의 자유 침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위 문장이 우리 사회 다수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나조차도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찬성하지만, 징역형을 불사하게 하는 “양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므로.
그런데 얼마 전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세미나 강의를 듣다가, 2013년 한국갤럽여론조사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응답비율이 76%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8%의 응답자가 대체복무제를 찬성한다고 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미나 발제자인 전수안 전 대법관은 ‘다수의 국민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대체복무제를 찬성한 것은, 국민의 인권감수성이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를 용인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위한 자유를 용인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국민의 의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국회, 정부, 헌법재판소, 대법원이다’라고 지적했다. 내 생각과 달리 변화의 걸림돌은 국민, 사회가 아니라 국회, 정부, 헌법재판소, 대법원과 같이 실제 변화를 이끌어낼 힘을 가진 기관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역량이 있는 기관들은 누구보다도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만든 시스템은 선재 앞에 놓인 얼음강과 같다. 선재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자진하여 얼음강을 깨고 녹일 리 만무하다. 그러니 얼음강을 깨고 녹이기 위해서는 강한 외부에너지가 필요하다. 다수의 국민이 대체복무제에 찬성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다수 국민의 ‘찬성’을 다수 국민의 ‘열망’으로 끌어올려야만 얼음강을 깰 수 있다.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캠페인과 작품활동이 계속되어 다수 국민의 찬성을 열망으로 변화시키고,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기관의 구성원들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지점에서 국제앰네스티의 캠페인과 민용근 감독의 ‘얼음강’과 같은 작품들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선재의 이야기를 보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얼마나 평범한 청년들인지를, 그가 내 아들, 연인, 남편, 혹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열망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성과 공감의 영역이므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캠페인과 작품활동이 계속되어 다수 국민의 찬성을 열망으로 변화시키고,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기관의 구성원들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더 나아가 어떤 청년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구분되는 일조차 없는, 자기 신념에 따라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그 때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다시 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너무너무 궁금하다.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 윤지애 후원회원님께서 작성해주신 리뷰입니다.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