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수상작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민족일보와 조용수>
제9회 수상작 <MBC W – 러시아 여기자 피살사건>
생각은 개인적이어야 한다.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
의사소통은 양방향 도로이어야만 한다.
여행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도로 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도로 말이다.
– 책 <넌 자유롭니?> 중 ‘양방향 도로를 찾아’에서 발췌 (국제앰네스티 발간)
이 짧은 구절은 표현의 자유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며 의사소통은 양방향 도로이어야 한다’는 문장이 그렇고, 이에 앞서 ‘생각은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구절이 배치된 것도 절묘합니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에 있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의 관계를 상징한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 제18조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제19조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전제한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자유권이면서 동시에 사회·경제적 권리입니다. 본질적으로 양심과 사상의 자유에 속하는 자유권이지만, 생각과 정보의 공유를 통해서 공동체 및 사회 구성원들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없으면,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게 됩니다.
표현의 자유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비판하고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사회의 건강성은 유지되기 힘듭니다. 한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가늠하는 언론자유지수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 및 삶의 질과 비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지부 등 해외지부들에서 일찍이 앰네스티 언론상을 제정했던 이유도 그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모든 종류의 인권과 그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흐르는 통로니까요. 앰네스티 언론상 시리즈 마지막 회는 표현의 자유 추구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해낸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제4회 수상작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다룬 ‘민족일보와 조용수’ 편, 그리고 제9회 수상작 MBC 의 ‘러시아 여기자 피살사건’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고백>
‘러시아의 양심’
사람들이 생전에 나를 불렀던 이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러시아의 자유’란 이름으로 기억되길 원합니다. 나 개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기사를 쓴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의 자유가 내 기사의 원동력이자 목적이었습니다.
러시아에는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구소련은 사회 모든 영역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었기 때문이죠. 제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도 구소련의 관영지 ‘이즈베스티야’에서였습니다. 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과 함께 구소련의 정치·경제 체제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내가 죽을 때까지 몸담았던 ‘노바야가제타’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지금 생각해보니 변화가 시작되려 하던 그때가 좋았습니다. 앞은 안개처럼 불투명했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개방을 통해 침체되고 관습화된 소련의 경제를 회생시킨다는 희망이 있었으니까요. 이제야 러시아 서민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도하고 정부에 쓴소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개인적인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는 더욱 부패해지고 빈부격차는 더 커졌으며 빈곤한사람들은 더 늘어났을 뿐입니다. 이는 특히 2000년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서 가속화됐지요. 무엇보다 그는 과거 공산정권보다도 폭압적인 스타일의 독재자였습니다. ‘러시아에는 자유도, 평등도 없다’ 이것이 현재 러시아 국민들의 속마음일 것입니다.
제 눈에 체첸인들은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 중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부터 역사적·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체첸을 강제 병합한 후 이용하기만 했습니다. 체첸에 석유를 공급하는 송유관을 설치해야만 카스피 해의 방대한 석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체첸을 그토록 탄압하는 푸틴은, 90년대부터 체첸 전쟁을 주도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습니다. 체첸은 푸틴에게 사람들이 사는 땅이 아니라, 석유 공급로이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러시아에 고통스런 민중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체첸에 제가 유달리 관심을 갖는 이유는, 체첸의 고통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체첸의 역사와 진실을 아는 사람으로서 체첸을 외면하는 것은, 제겐 한쪽 눈을 가리고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체첸을 방문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나는 취재 도중 러시아 군에 붙잡혀 체첸 포로들과 함께 더러운 구덩이 속에서 얼마간 살아야 했습니다. 포로에 대한 끔찍한 고문, 민간인 학살, 분쟁으로 무고하게 희생되는 아이들… 그곳에서 수많은 인권 유린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 나는 1년에 30차례 이상 체첸을 잠행 취재했고, 러시아의 유일한 체첸 전문 기자가 됐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땅, 입 없는 사람들. 그곳 체첸인들은 나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800명의 관객을 볼모로 체첸군이 벌인 모스크바 극장 관객 인질 사건에서, 체첸 반군은 협상단 대표로 저를 요청했다 합니다. 그러나 끝내 푸틴 정부는 극장에 독가스를 살포해 인질과 테러범을 포함해 200여 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체첸의 참상>
나는 그날 저녁에도 러시아군이 체첸 반군에게 저지른 고문 실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마무리 지을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소중한 자료들을 아파트에 둔 채, 나는 아파트 앞에서 네 발의 총을 맞았습니다. 그간 의문의 죽음을 당한 내 동료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푸틴과 마피아 조직의 관계, 러시아 부호들의 비리 등 권력에 관한 진실을 보도한 동료들은 모두 죽어갔습니다. 지난 10년간 ‘노바야 가제타’의 내 동료들만 4명이 살해됐고, 전체 기자들 중 260명이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러시아는 사소한 진실일 지라도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을 알릴 때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나는 진실이나 양심, 사상 이런 것들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삶 자체보다 우월한 가치들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가장 높은 단계를 실현하는 것들이죠. 비상식적이고 잘못된 권력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참아내질 못합니다.
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본 것을 전달하고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기에 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나만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땅 한쪽에서 이 같은 인권 침해가 자행되는 한 러시아에도 인권과 자유는 없다는 생각으로 체첸 문제를 끈질기게 보도했습니다.
<안나를 추모하는 사람들 >
더 이상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러시아인들 대다수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본성임을 깨닫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장미꽃으로 나를 애도하는 수많은 벗들이여, 슬픔을 표현했듯이 체첸의 실상에 대해서, 기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푸틴의 폭압에 대해서 분노를 표현해 주시기를.
<민족일보 창간인 조용수의 생애>
전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갇혀 있던 신문사 동료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를 업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기까지 했지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난 어느 정도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좌익 경력이 있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지닌 아주 잠깐 동안의 좌익 경력이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뒤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좌익 경력을 희석시킬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배경 자체가 나를 비롯한 혁신 세력의 평화통일론에 안보의 위협을 느껴서였으니, 당시 진보언론이었던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나를 처단하는 것은 상징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걸 죽기 바로 얼마 전에야 깨달았으니 난 그저 너무나 낙관적이었습니다.
1961년 2월 13일부터 5월 19일까지. 내 생애를 통틀어 잊을 수 없는 날짜입니다. 나의 전부를 걸었던 신문 민족일보가 발행되었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일보는 4.19 이후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사회대중당을 비롯한 혁신 세력이 민주당 장면 정권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창간됐습니다. 혁신계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성에서였죠. 민족일보는 당시 진보 언론을 대표하는 신문이었습니다. 창간호부터 장면 정권이 미국과 맺은 ‘한미 경제 협정’이 부당한 협정임을 비판했고,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농촌의 생활상을 탐사 보도하는 획기적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민족일보는 한달 만에 4주 판매 1위에 올랐고, 가판대 판매율은 조선과 동아일보를 앞지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무척 진보적이었으니까요. 정말이지 동료들과 신나게 일했던 기억뿐입니다. 서민을 위한 신문으로 출발해 서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니 우리의 취지와 목적을 제대로 살린 셈이었으니까요. 정부를 비판하는 데도 가감이 없었던 민족일보는 정부에 의해 인쇄 중지 조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있을 사람들입니까? 민족일보는 곧바로 이를 ‘제2공화국의 첫번째 언론자유 탄압’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습니다.
비록 혁신계가 정권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 시대를 향한 낙관적 분위기 속에서 두려울 게 없던 우리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배경과 민족일보가 폐간된 배경은 같습니다. 바로 ‘이념’ 때문이죠. 따지고 보면 이념 때문도 아닙니다. 61년 4.19 1주년을 기념해 전국적으로 일었던 평화통일론은 이념적 지향을 띤 담론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분명히 반대했고, 그들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긍정적으로 본 적도 없으니까요. 다만 북한을 통일론에 있어서 파트너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대화하자,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50년 후에도 이뤄지기 힘든 현실인 것을 보면, ‘진보적인, 너무나 진보적이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요.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여전히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던 군부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박정희의 쿠데타와 함께 평화와 진보를 이야기하던 시대 분위기는 공기처럼 사라져버렸고, 진보 언론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민족일보도, 나의 열정적이었던 인생도 끝이 났죠.
<기자 시절의 조용수>
나는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나의 이념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언론은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위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권력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죠. 만약 내 주장하는 바가 잘못된 것이라면, 여러 사상과 겨루어 잘못된 점은 비판 받고 민의에 의해 수정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억압적인 권력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는 나와 동료들의 처형을 결정했던 군부의 행태를 보고 앞일을 예감했습니다. 언론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그 정부의 민주성을 가늠할 중요한 잣대입니다. 흠이 많은 권력, 감출 게 많은 권력일수록 자유를 두려워하지요. 만약 50년 후에도 내 나라가 권력에 흠집 날 것을 우려해 국민을 구속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라면 무척이나 허탈할 것입니다.
나는 처형된 이듬해 1962년 국제저널리스트 협회에서 ‘국제기자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내 죽음에 대한 대가인듯해서 슬픕니다. 죽어서 영예를 누리기보다 살아서 동료들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서민들의 격려를 얻던 그 기쁨을 한 번 더 누리고 싶었습니다. 벗들이여, 잘못된 사상을 만드는 것은 사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억압하는 권력임을 기억해 주시기를.
※현재 ‘민족일보와 조용수’ 편은 다시보기 서비스가 중지된 상태입니다. MBC에 다시보기 서비스 해달라고 요청합시다^^
*수상작 원본 링크는 아래 관련링크를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