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은 언제나 흉흉했다. 억울한 일도 무지 많았다. 고작 머슴이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마을 내 모든 흉한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다던지, 아니면 신분 낮은 계집아이기에 고관벼슬하는 나으리들의 희롱과 농락을 참아내야만 한다던지.
원통함과 한쌓인 그들이 찾아간 곳은 속칭 ‘나랏님’들이 계신 곳이었다. 관가를 찾아가 곡소리 내며 바닥을 뒹굴고, 신문고가 찢어져라 두들기며 ‘내 이야기 좀 들어달라’ 외쳤다. 그럴 때마다 나랏님들은 정의의 사도로 나타나곤 했다, ‘권선징악’이라는 미덕을 품은 채로. 오죽하면 장화와 홍련이도 죽고 나서까지 억울함을 풀겠다고 고을원님을 찾아갔을까.
물론 당시에 모든 나랏님들이 응당 사법정의를 펼치셨는지에 대해서는 검증할 길이 없다. 다만 문제생길 때 나랏님에게 달려가는 이 사법적 프레임만은 지금ㅡ역할이 세분화되고 직함이 바뀌었을 뿐ㅡ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서 ‘징악’ 담당관은 단연 검찰이다. 국가가 형벌권 주면서 그렇게 규정했다. 사람 사는 곳에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고, 그 사건에 대한 엄중한 사리판단, 피고와 원고의 입장을 다각적으로 조명한 후 최종적인 ‘권선징악’을 내리는 것이 그들의 시대사명일 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요즘 이 사법계 자체는 ‘권선’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징악’을 감당하기도 버거워보인다. 최근에 실무수습을 하기 위해 파견된 한 검사는, 검사로서 제대로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여성 피의자와 부적절한 성관계부터 시작했다. 시대사명에 거스르는 행동임은 물론 무소불위한 권력이 낳은 추악함에 몸서리쳐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사람들은 많이 무뎌졌다. 법조계와 정계의 끈적한 유착, 검사-경찰간의 수사권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 검사비리와 관련해 연발 올라오는 뉴스들은 권력남용, 부패, 비리로 점철된 과거 나랏님들 행실의 연장선상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누군가는 ‘성폭행을, 살인을, 사기를, 당한 놈이 운이 없었던게지’하곤 무심히 채널을 돌려버린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인정하게 만든 걸까.
KBS 추적 60분팀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수사를 나선 ‘경찰’과 이를 지휘하는 ‘검찰’조차도 되려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단다. 화면 속의 피해자들은 우리와 같이 평범하고, 무고한 사람들이다. ‘순진하게 나랏님만 믿고 있었다’는 것이 죄라면 죄랄까. ‘내가 죄없이 떳떳한 것이 확실하다면, 국가가, 검찰이, 경찰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믿음에 돌아온 것은 처절한 배신뿐이었다.
“이름 앞 두 글자가 같은 이유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당했습니다. ‘범인이 아닌 증거를 직접 증명해야한다’는 말에 일가친척을 다 동원해 실제 용의자집 근처에서 잠복도 해봤지만, 역부족이었죠. 검찰이 내민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증언이 전부였어요”
“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엄마가 이 사실을 검찰들에게 역설하기도 했죠. 제 증언이 재판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지금 처음 들었어요. 검찰아저씨들과 이야기하다 ‘경찰은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니까,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더 낫다’는 말도 들었어요”
-〈’나는 억울하다’ 검사수사 피해자들의 절규〉 방송내용 중 일부
정의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모든 맥락과 진위를 따져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자칫 ‘내 실적, 그에 따라오는 내 몫이 줄어들 수 있는 행위’로 변질되버린 요즘.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경찰은 ‘일단 검거부터’ 하고, 사법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찰마저 경찰화돼가는 마당에 사실상 ‘사회적 사형’을 당한 검찰수사 피해자들은 어느 곳에서도 할 말이 없다.
다큐가 안겨주는 착잡함은 “과연 이것이 ‘운 나쁜’ 극소수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문제일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에 치중된 우리 사회가 영상 속 인물들과 같은 수사과정에서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해선 어떤 논의를 시작해보아야 하는걸까.
일부에서는 검찰개혁방안이 유일한 답임을 피력한다. 검-경이 선 긋고 밥그릇을 공평히 나눠가지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마냥 말이다. 정작 피해자들은 사과 한 마디 못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예비 피해자로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은 몸 사리면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수 밖에 없을 거다. ‘죄 지은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지, 운 없게 걸리지나 말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과거 수사 피해건에 대한 사과와 배상’, ‘앞으로 다시는 피해받지 않을 것에 대한 보장’, 그리고 이를 위한 논의의 장이지 않을까. 60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기존의 사법정신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 무뎌진 우리네를 직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할 때, ‘행복한 국민, 정의로운 검찰’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경찰’을 보며 눈물짓는 검찰수사 피해자들의 절규가 사그라드는 세상을 비로소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제15회 국제앰네스티 언론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