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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나이는 군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급속한 우경화, 보수화 경향 때문일까. ‘군대’ 코드가 흥하고 있다. 관심있는 여자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군대 얘기라 했거늘.. 여자들조차 <푸른 거탑>이나 <진짜 사나이>가 재미있다고 난리인걸 보면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군대는 이미 우리 사회 안에 깊숙이 내재화 되어있었다. 그런 와중에 태안에서 5명의 청소년이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적되는 문제점은 많다. 구명조끼 미착용, 무자격 교관, 정부 미인증 시설, 인솔교사의 부재, 관리허술 등등등.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질문해 봐야할 것은 이것이다. ‘도대체 왜 아이들이 해병대 캠프에 가야하는가’

 

군대에 의해 훈육되어 복종하는 인간

집에서 부모님말씀을 잘 듣지않는 아이, 게임중독인 아이, 도벽이 있는 아이, 욕을 잘하는 아이, 이기적인 아이들을 최대한 개과천선하는데 주력하는 코스이다.

평소 아이들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가슴앓이하시는 부모님들에게는 좋은 기회이다. 5박6일동안 아이들은 해병대PT, 장애물훈련, 행군(4km~12km), 서바이벌게임(페인트볼), 캠프파이어, 설원축구, 환경생태관전망대 관람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동기들과 협동심을 기르며 멀리 떨어져있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전상서를 쓰는 등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위 내용은 한 사설 ‘밀리터리 캠프’의 홍보글이다. 캠프에 다녀오면 하루 아침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된다는 식이다. 군대식 체험과 규율로 아이의 예의범절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왜 국공립 유치원과 초등학교 정규과정으로 편성하지 않을까. 답은 간단하다.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전부라고 해도 좋을)의 경험은 현대 민주사회 시민이 갖춰야할 교양과 덕목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군대에서 계급과 명령에 의해 상명하복하는 수동적인 인간은 나치 제3제국이나 소비에트 연방에나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사람의 가치를 국가와 집단의 뒤에 놓는 근대적인 발상이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필요에 의해 총동원되는 국민(사실 우리는 의미에 대한 고찰 없이 남용되고 있는 ‘국민’이라는 언어적 표현에 대해 경계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해체해나갈 필요가 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이유를 상기하라.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시민을 기르는 것이지 나라에 충성할 국민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는 부적합하다. 징벌로써의 신체적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게끔 하는 것은 군대식 훈육으로 사람을 통제하기 쉬운 병사로 만드는 것일 뿐, 그것을 ‘극기’라고 미화하는 것은 심각한 언어도단이다. 유신독재시절, 학교에서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했던 ‘교련’의 역사를 우리는 야간통행금지나 치마길이단속만큼이나 어이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다. ‘해병대 캠프’ 체험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만한다.

사설 캠프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고 있는 어린이

나치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단언컨대, 아이들에게 군사문화를 주입하는 것은 나치나 할만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학생들에게 병식교련을 실시했다. 이 병식교련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인 1969년 고교 필수과목 ‘교련’으로 다시 태어난다” (변상욱)

 

뿌리 깊게 내재화된 군대에 대한 고정관념

한 발 더 나아가 본다면, 군대식 훈육은 정부와 국가가 늘 절절하게 말하는 ‘글로벌 인재’를 키우기 위한 방법과도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90년대말부터 ‘한국의 빌 게이츠,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키워야한다고 부르짖었다.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한 편이 벌어들이는 돈이 현대차가 1년 동안 수출하는 차 몇 대와 같다는 말이 대단히 통찰력 있는 소리처럼 횡행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한국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주커버그’를 국가적으로 장려하며 창의적인 인재형을 주문하고 있다. 학교와도 잘 맞지 않았던 스필버그와 잡스, 주커버그 등을 한국식 군대에서 2년씩 썩혔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국의 군대 체계와 문화는 일제강점기의 일본군대에서 그대로 따왔는데, 일본 군대는 19세기 프로이센 군대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나치 독일과 소련 역시 프로이센의 군대문화를 계승했다.

군인의 덕목이 강점으로 작용할만한 곳은 오로지 군대뿐이다. 군대는 아무리 좋게 미화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조직 중에서도 가장 특수한 집단이다.

보통 ‘재사회화’는 군에 몸 담았던 사람이 사회에 들어올 때 이루어지는게 정상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이 사회적응에 겪는 어려움은 고대 로마부터 현대 미군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역사다. 그런데 유독 한국은 거꾸로 되어있다. 사회가 군대를 따라하고 있다. 학생들은 해병대 캠프에 가고, 심지어 ‘창의적인 글로벌 인재’가 되기를 주문 받는 대기업 신입사원조차 오리엔테이션에서 구보와 단체행동 등 갖가지 군대식 규율을 주입 받는다. 군대식 문화가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들을 ‘재사회화’하고 있다. 심각한 주객전도라 할만하다.

여기에는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된다’ ‘군대에 다녀와야 철든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통념이 한몫한다.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현역이 아닌 경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횡행한다. 보다 심각한 점은 남성들끼리 군필자의 미필자에 대한 차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군대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들조차도 이와 같은 시선에 동의한다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군대에 다녀와야 어른이 된다’라는 이상한 마법에 사로잡혀있다. 그렇다면, ‘철든 어른 남자’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 가장 많아야하는데, 군대 경험을 강조하는 소위 ‘한국 어른 남자’가 하는 일들을 보면 ‘글쎄올시다’가 아닌가. 그 윤창중조차 본인이 병필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데 말이다. (“22세에 전투공병대 폭파병(demolition engineer)으로 군에 가 북한군의 어뢰·기뢰 전술을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병영캠프가 그렇게 유용하다면 해외 기업에도 수출해 창조경제에 기여해보는건 어떨지?

 

병역의 의무가 정말 ‘신성’하다면, 특혜는 없어져야한다

군필자에게 가산점을 주자는 해묵은 논쟁만큼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도 없다. 가산점을 준다고해도 실제로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과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보편적 혜택이 아니다) 모든 제대장병이 공무원 시험을 볼 것도 아닌데, 그 ‘코딱지만한’ 혜택 가지고 이렇게 오래도록 왈가왈부 하는게 놀라울 지경이다.(군가산점제 띄우기 또다시 힘 잃었다) 무엇보다, 병역 의무는 ‘군 가산점’ 따위로 흥정할만한 대상이 아니다. 일종의 기만이다. 차라리 군 복무를 할 동안 부당한 대우 없이 정신적-신체적으로 건강하게 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처우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뇌종양에 두통약 처방받은 사병 결국 숨져) 병사 1인당 연간유지비가 상병 기준 456만원(국방부 2013~2017년 국방비 홍보책자)에 불과하다니, 병사들 월급, 급식이나 좀 제대로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못된 군문화부터 뿌리 뽑는게 우스꽝스러운 군가산점 논의보다 훨씬 우선하는게 아닐까

나는 병역특례에 반대한다. 병역의 의무가 대한민국 모든 남성의 의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야구를 잘해서, 축구를 잘해서, 올림픽 동메달을 따서, 국제콩쿠르에서 3위 안에 입선해서, 병역이 면제되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례’가 인정되는 순간 병역 의무는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의무로서 존중받지도 못한다. 특혜와 면제가 발생하는 순간 현역으로 가는 병역자원들은 ‘잘난 것 없어서 면제받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버리는 곳이 된다. 군대가 ‘재능을 썩히는 곳’으로 인식되지 않으려면 어떤 특혜나 면제도 있어서는 안된다. 최근 폐지되어 최전방으로 재배치 받은 연예병사 논란도 마찬가지다. 전방 야전부대로 가는 것이 형벌의 하나처럼 비춰지면서, 국방부 스스로 전방 부대를 ‘나쁜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 얼마나 자기배반적인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지지한다

얼핏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하고 지지한다. (최소한 군대를 갔다 와야 군대를 비판할 수 있다는 구차한 인증을 통해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더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밝히건데, 나는 2년 2개월의 현역복무와 6년의 예비군훈련을 모두 마친 예비역이다) 군대를 회피하기 위해 괄약근을 조절하고 생이빨을 뽑거나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옷을 벗고 난동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럼 군대 갔다오면 비양심이라는 거냐”라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은 안사랑’이라는 말과 다름 없는 것으로 그 분들의 국어해독 능력에 안타까울 뿐이다) 이것은 병역회피가 아니라 대체병역의 차원으로 봐야한다. 대다수의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무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의무를 비겁하게 회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집총(총을 잡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할 목적으로 무기를 자기 손에 쥐는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 사람의 온전한 평화적인 신념인 것이다. 피를 못 보는 사람이나 회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의미로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들을 무조건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 유연함을 발휘하여 좀 더 사회에, 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도대체 왜 불가능한가? (마치 공중보건의 제도처럼 말이다) 군 후방은 물론이고 사회에는 생각보다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소외층 돕기나 사회봉사, 공공근로, 재능을 살린 사회참여 등의 다양한 활로를 만든다면, 평화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대체복무가 해가 될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누가 현역으로 군대를 가려고 하겠는가, 라고 묻는 질문은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한국의 애국-국방의 이데올로기는 대체복무를 허용한다고 해서 현역자원이 모자랄만큼 허약하지 않다. 또한 대체복무는 현역복무에 버금가는 형태로 설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특례’로 기초 군사훈련만 하고 사실상 병역을 면제 받고 있는 운동선수나 예술계열의 병역자원들도 이런 식으로 병역을 이행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병역의무에 ‘면제’는 사라져야하되 보다 개성있고 다양한 개인을 품을 수 있도록 현실에 맞춰 병역법을 유연하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

무하마드 알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겁쟁이라서도, 특정 종교를 믿어서도 아니었다. 누가 알리를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진짜 사나이는 군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맹신 되고 있는 군대문화의 신화에 대한 ‘무장해제’가 필요하다. 진짜 사나이는 예능에도 없고 해병대 캠프에도 없다.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에 참지 않으며, 선한 동기와 의식으로 공동체를 지키는 사나이는 군대가 기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나이가 반드시 총을 잡아야 할 이유도 없으며, 더더군다나 모두가 그 사나이가 될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할 것이고 그 누군가는 건강하고 민주적인 시민사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날 것이다. 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짜는 그렇게 태어난다. 

 

ⓒ Banksy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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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성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와 병역거부’를 앰네스티 인권입문과정(4강)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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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형 인간을 만들기 위한 훈육 : 박상기, 시사인

우리 군사문화의 뿌리는 프로이센? 사무라이? : 변상욱, CBS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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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개인의 의견으로 국제앰네스티의 공식입장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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