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블로그

디스토피아는 이미 와있다

듀나 / 영화평론가, 작가

 

론 하워드의 [아폴로 13]이 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화는 우주를 무대로 하고 위기에 빠진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겪는 모험을 그린다. 이 정도면 SF라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0년대 초. 다시 말해 역사물이다. 영화가 그리는 테크놀로지도 모두 몇십 년 묵은 구식이다. 심지어 케네디 센터에서 우주선을 구하는 중요한 계산을 위해 동원되는 장치는 컴퓨터가 아니라 계산자이다. 케네디 센터에서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동일한 계산 결과를 낸 계산자를 동시에 치켜 올리는 순간은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는 SF처럼 보인다. 그것은 역시 우주를 무대로 한 현대 배경의 영화인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도 마찬가지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SF일 리가 없는 영화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자동적으로 SF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우주는 여전히 미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지구 중력장을 벗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발견되어 모두가 달로 휴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우주는 앞으로도 미래의 영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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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SF의 소재가 전부 우주나 우주여행과 같은 것은 아니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SF의 소도구처럼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당연한 일상의 일부이다. 지금의 시청자들은 [스타 트렉] 시리즈에 나오는 트라이코더를 보면 그 모양의 투박함과 기능의 불편함에 당황한다. 우주여행에 사용된다는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웬만한 스마트폰의 기능과 디자인은 오래 전에 트라이코더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소형 텔레비전을 들고 다니며 본다는 것은 SF에나 나오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철에 앉은 사람들의 10분의 1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50년대 SF작가들이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많은 것들이 현실화되어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SF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가전제품이기 때문이다.

영화 의 트라이코더

영화 <스타트렉>의 트라이코더

그렇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종종 과거의 SF작가들이 끔찍한 악몽으로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는데도 그 사실을 깜빡한다. 악몽이 현실화된 건 사실이나 그 과정이 너무나도 은밀하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SF에서 거창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린 것들과 이것들이 동일한 것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EBS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컬른 호백의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는 과거의 SF작가들이 그린 디스토피아 세계 중 하나가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막연한 일부가 아니다. 이미 여러분은 그 악몽에 노출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당연하게 쓰고 있는 무료 서비스들 말이다. 그것들을 쓰려고 등록하기 전에 사용약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얼마나 침해하고 있고, 우리에게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았는가? 조금 더 겁을 먹고 싶다면 컬른 호백이 묘사한 프라이버시의 느리고 조용한 죽음은 우리나라에서 더 직접적이고 끔찍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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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eidf.org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

 

호백이 그린 디스토피아적인 현재는 사실 SF작가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SF작가들은 대기업과 정부가 온갖 방법으로 시민들을 도청하고 염탐하는 미래를 생각했지만 우리가 이런 식의 무료 서비스에 가입해서 자신의 개인정보를 스스로 제공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사회의 발전은 과거의 예상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래가 더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예상했던 위험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위험을 함께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이 문제점의 해결책이 두 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긴 과거의 SF 소설들이 이런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들은 모두 허망했다. 위험과 해결책 중 오로지 위험만이 현실성을 가진다.

대기업과 정부의 감시가 전통적인 위협의 모습을 취할 때에야 사람들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과거의 SF 예언자들이 말했던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 에드워드 스노든 스캔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그가 폭로한 현재가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의 예언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NSA의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

물론 정보기관이 무고한 시민의 사생활을 염탐하고 있다는 것도 무척 나쁜 일이다. 그리고 그 염탐을 위해 세금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투입되었다는 것은 소름끼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스노든의 폭로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순식간에 시들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도 받지 못했고 제대로 된 망명지도 찾지도 못했다. 그가 폭로한 사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는데도 사람들은 다시 정부기관에게 염탐당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위에서 무료 서비스의 프라이버시 침범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걸 알게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가입하지 않을 거 같은가? 나 역시 이 서비스를 끊을 생각이 없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터넷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감시 세계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 종속된다. 옛날 SF 소설에서는 이런 것을 간단한 과학법칙과 액션으로 해결하는 근육질의 영웅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 과연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소설에서 나왔던 것 같은 해결책이 가능할까? 잊지 마시라. 그것들은 소설 속에서도 공허했다.

 

* 이 콘텐츠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소식지 <Amnesty Magazine> 2013년 004호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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