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정권의 서슬이 전국으로 번져 결국은 유신헌법을 탄생시켰던 그 해, 1972년.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최대 관심사는 ‘오적필화사건’의 연루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오적(五賊)>은 김지하 시인이 월간지『사상계』에 국회의원, 장성, 재벌, 고급공무원 등의 권력집단을 다섯 도둑으로 규정하고 통쾌하게 풍자한 시였습니다. 그러나 시 한편 때문에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잡지는 폐간 당하고, 발행인과 편집장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독재의 짙은 그늘에 풍자조차 처벌을 받는 암울한 시대, 누가 인권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요?
서슬퍼런 군부독재시절, 숨막히는 시절을 딛고 위태로운 시기 용감하게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양수정, 박문진, 윤현, 신재우, 문동환, 이항녕, 백철, 송지영, 함석헌, 부종혁, 최남백, 양윤식, 최종고, 이병린, 한승헌, Baylis, 민병훈, 송도영, 류근주, 김재준, 서영희, 리영희, Holze, 김정례(방명록 기명순)”
1972년 3월 28일 서울 뉴코리아호텔 라운지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첫 창립총회가 열립니다. 참석자 24명. 조촐한 인원이었지만 그 어떤 불길보다 시작은 뜨거웠습니다.
“국제앰네스티 덕택으로 내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소”– 언론인 송지영
한국지부가 창립된 그 해 10월, 유신 헌법이 통과되면서 전국에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한 반(反)유신 시위들이 계속되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란음모’, ‘간첩’, ‘긴급조치 위반’등의 혐의로 마구잡이로 잡혀갑니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 앰네스티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펼칩니다. 1974년 각 지역 대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1천명이 넘는 학생과 교수들을 조사하고 203명을 구속한 소위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지부의 신청으로 이 사건과 대통령긴급조치 사건 조사를 위해 미국인 변호사 윌리엄 버틀러 씨가 방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버틀러 변호사는 미국 하원에서 한국의 인권문제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1974년민청학련사건 등 대통령긴급조치사건의 조사를 위해 내한한 미국인 변호사 윌리엄 버틀러씨(앞쪽 가운데) 함석헌, 윤현, 한승헌, 부완혁 ,이병린(왼쪽 하단부터 시계방향으로)©Amnesty International
”이번 호는 당국의 검열(삭제)관계로 제작인쇄를 다시하게 되어 발송이 늦어진 점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촛불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각종 시국 재판을 방청하고, 직접 재판부에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기도 하고, 독재에 반대하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의 변호료와 영치금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족의 생계까지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활동을 정부가 달가워 할 리가 없지요.
앰네스티의 활동은 늘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법무부에 등록된 사회단체였던 앰네스티는 단체의 뉴스레터마저 검열되고, 내용삭제와 재발행을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칼날은 검열에 그치지 않고 당시 전무이사였던 한승헌 변호사를 소위<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구속하고, 사무국장 및 국원들을 수배하면서 지부가 폐쇄되고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당시 김대중(전 대통령)은 사형을 언도 받았고 국제적인 석방 캠페인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80년대 부침을 겪던 한국지부가 1993년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던 건 끝까지 촛불을 들고 있던 회원들 덕분이었습니다. 지부가 없음에도 회원들은 각 지역에서 작게 나마 인권 강연을 하고 탄원 캠페인을 이어나갔고 그것이 지부가 다시 문을 여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현재 1만 3천 여 회원이 함께하는 지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원님 덕분에 굴곡 많은 43년, 한국에서 인권 운동을 이어 올 수 있었습니다.
43년 전 오늘,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되었던 24개의 촛불이 앞으로 2만 4천, 24만 개의 촛불로 늘어났으면 합니다.
어둠이 짙을 수록, 촛불은 더 밝게 빛납니다. 우리가 더 많은 촛불을 켠다면 어둠은, 인권침해는 사라집니다.
오늘 주변 지인들과 함께 촛불을 더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