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인터뷰

양심수, 그들의 이야기 ‘황대권 작가’

1.선생님, 요즘의 근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지금 산 속에서 농장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밭 일구고, 집도 짓고… 육체 노동이 주로 많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대중들은 황대권 선생님에 대해 ‘야생초 편지’의 작가, 생명 생태운동가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나 선생님이 오래 전 국제앰네스티에서 선정된 양심수였다는 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듯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 ?자주 받는 질문이겠지만- 입니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국제앰네스티의 양심수가 되셨고,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처음 감옥에 들어간 때가 1985년입니다. 1985년, 제 나이 서른 살 때 들어가서 마흔 네 살에 나왔습니다. 삼십 대, 사십 대 중반을 완전히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서 감옥에 들어갔죠. 그래서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공식 명칭은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었습니다. 총 15명이 징역을 살았는데, 저는 공범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법정에서 처음으로 봤어요. 아주 철저한 조작 사건이었다는 거죠. 저도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처음 겪어 봤어요. 그래서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지하에 있었죠.- 에서 60일 동안 온갖 고문이라고 하는 고문은 다 받고, 그 끝에 간첩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딱 들어가니까 저 같이 두들겨 맞아서 간첩이 된 사람들이 사동 안에 가득 차 있었어요. 이 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한 독재 아래 있었는지 조금은 짐작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감옥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감옥 안에서 그러니까 80년대 말 까지는 수감자에게 편지를 할 수 없었어요. 감방 안에 펜도 없고, 종이도 없고, 무엇을 써도 간직 할 수 없는 깜깜한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사회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때, 노태우 대통령 때였는데, 전 세계에서 외국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우리사회의 기본적인 제도나 시설 등을 국제 수준으로 높이자’ 해서 우리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됐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1987년부터 시작됐는데 감옥이 제일 늦어 1990년 말쯤에야 처음으로 외부로부터 편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에서 오는 편지를 처음 받은 때가 1990년 12월 입니다. 지금도 기억을 해요. 어느 날 갑자기 영어로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힘을 내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엽서를 받았어요. 방금 전에 저도 이 엽서를 쓰고 왔는데 감개가 무량합니다.

3.선생님께서는 어쩌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으실 텐데, 희망을 잃지 않고 보내셨던 수감 생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90년대까지는 정말 힘든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일체 글을 쓸 수 없었고, 편지도 받을 수 없었고, 신문 잡지도 보여주지 않았고, 정말 갑갑하기만 한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이후부터 조금씩 나아졌죠. 외국에서 편지도 받을 수 있고, 신문도 넣어주고, 또 볼펜으로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다만 쓴 것을 간직할 수는 없었죠. 매일 검사를 나와서 일기 등을 뺏어가곤 했습니다. 출소 후 ‘야생초 편지’라는 책을 내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요. 이것은 제가 감옥 안에서… 생각해보세요.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들어가서 두들겨 맞고… 제가 얼마나 원통한 마음에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그래서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하지만 감옥 안엔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고, 그런 상황 속에서 내 몸을 고치기 위해서 풀을 뜯어 먹기 시작했어요. 풀을 뜯어 먹으면서 풀을 직접 길렀는데, 풀을 기른 기록을 그 안에서 제가 간직할 수 없으니까 이것을 편지로 일일이 쓰고, 그림으로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소질이 있어서-, 한 장 한 장 편지로 밖으로 내보낸 것이 나중에 ‘야생초 편지’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 책이 시대적 요구와 맞아 떨어져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풀과 함께 했던 생활이 저의 삶이나 생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 전에 저는 정치 지향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는데 감옥 안에서 편지와 풀을 통해 생태주의자로 변해갔습니다.

4.편지 이야기를 좀 더 묻겠습니다. 수감 생활하시면서 조금은 낯설기도 하셨을 텐데, 외국의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이 보내준 엽서와 편지를 받았을 때, 서신왕래가 가능 했을 때부터 선생님의 수감 생활이 어떻게 변화하기 시작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바빠졌죠. 아주 바빴습니다. 다행히 제가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이 사건이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었잖아요? 제가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른 분에게도 편지가 왔는데 이 분들은 영어를 할 수 없어서 답장을 못 했습니다. 근데 저는 다행히 답장을 할 수 있었고, 꼬박꼬박 했습니다. 문제는 답장이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교도관들이 영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인데요. 저도 영어로 쓸 때, 나도 영어 실력이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으니까 답장을 쓰면 초안을 먼저 씁니다. 그리고 이것을 편지지에 제대로 옮겨 씁니다. 그 다음 모든 편지들은 교도관에게 검열을 받아야 하니까 검열을 위해서 또 한글로 번역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편지 하나가 나가니까 -들어오는 편지도 똑 같은 과정을 거치고- 그래서 편지 한 통을 쓰면 하루가 쉬이 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10년이 넘게 거의 매일 편지 한 통씩을 썼습니다. 그게 저에겐 영어 공부도 됐고, 또 영어 편지뿐만 아니라 한글 편지도 하루에 한 통씩 썼기 때문에 엄청난 글쓰기 공부가 됐죠.

제가 출소하고 나서 우연히 20대, 대학시절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었는데 내가 썼지만 이게 무슨 소린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온통 한자 투의 글, 일본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글, 예를 들면 민족적, 대국적 등의 ‘~적’을 주로 쓰는 아주 무미건조하고 굉장히 형식적인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그런 식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마치 눈 앞에 편지 쓰는 대상자가 있는 것처럼 일상적인 용어를 쓰다 보니 제 글이 굉장히 순화되고 글 쓰기의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작가 수업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걸 말씀 드리면, 앰네스티 회원들이 저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또 앰네스티 회원뿐 아니라 국제 팬클럽 회원들도 저에게 편지를 많이 해줬습니다. 제가 양심수로 지정이 된 것은 안기부에서 검거 이유를 발표하기를 제가 미국 유학 당시 미국 반정부 신문에 전두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여러 편 쓴 적이 있는데, 그것들을 간첩활동의 증거로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외에 글을 써서 감옥에 들어간 사람으로 알려져서 앰네스티 양심수로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국제 팬클럽에서도 필화 작가로 알려져서 편지를 받게 된 것이죠. 특히 앰네스티 회원들은 지속적으로 저에게 편지를 보내줬는데 이 분들이 처음에는 편지 내용이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접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등의 이야기였어요. 그리고 저는 이에 대해서 꼬박꼬박 답장을 했죠. 출소 후 이 분들이 저를 초청했습니다. 유럽 앰네스티에의 초청으로 유럽을 두 달 동안 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이 노르웨이였는데 노르웨이에서 VIP대접도 받고, 국영TV 토크쇼에 출연도 하고, 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이 분들이 나와서 말하길 ‘처음엔 당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편지를 했는데, 당신 편지를 받고 나니 누가 누구를 위로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제 답장이 감옥에 있는 사람의 글 같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초청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그 앰네스티 회원들과의 편지를 통해서 밖에 나와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제 인생의 멘토들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이 분들 초청으로 편지 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일부는 제가 그 집에서 일주일에서 몇 달간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 분들의 삶을 옆에서 보면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임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훌륭함은 지식이 많거나,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똑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가정주부라든지, 글을 쓰는 작가라든지, 학교 선생님 등의 사람들인데 그 평범한 사람들이 동네에 모여서, 말하자면 앰네스티 지역모임 인데요, 수다 떨듯이 자연스럽게 알지 못하는 제3 세계 양심수에게 편지를 씁니다. 3년, 5년, 10년 꾸준히 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자기네들의 삶의 이야기를 하고 교류를 합니다. 제가 그 분들의 편지가 없었다면 과연 견뎌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마음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분들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인권에 대한 생각, 애정, 관념들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편지 왕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지금도 그 분 중 한 분은 제 삶의 사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가장 오랫동안 편지 한 분은 저희 어머니 나이 또래이고 지금은 거의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는데, 그 분은 편지하는 과정에 저의 양 어머니로 삼았어요.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분도 자연스럽게 편지를 통해서 저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영국에 가서 이 분에게 신세를 가장 많이 졌죠. 그리고 그렇게 가족처럼 편지를 주고 받다 보니까 그 분의 자녀들과는 제가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언제든지 영국에 가면 제 식구들이 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돈 한 푼 없이 그 곳에 가도 편안히 그 곳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마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편지를 통해서 인간 대 인간의 정이 통한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회생활을 했다면 이런 기회가 있었을까요? 감옥이라는 극한적인 조건으로 인간의 실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교류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편지쓰기 마라톤 탄원편지들

이 탄원편지 쓰는 것이 어찌 보면 굉장히 형식적이죠. 정해진 틀에 ‘힘내세요.’와 같은 틀에 박힌 말을 따라 쓰니까요. 물론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편지를 받는 양심수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들어갔는지, 이 사람의 수감 조건은 어떤지,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상황은 어떤지에 대해서 공부해 보십시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영어사전 뒤적거리며 편지 한 장 쓰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편지가 거듭되다 보면 아마 그 사람이 위로 받는 것 이상으로 여러분 자신이 위로 받을 것입니다.

5.선생님의 귀한 경험, 이야기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엔 인터넷, 전화, 방송 등 다양한 매체들이 있는데, 특히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왜 소중하고 중요한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또 편지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간의 소통이 양심수에게 어떤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저도 현대문명의 힘을 거부하지 못해서 요즘엔 거의 컴퓨터로 글을 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자격이 없어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컴퓨터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끔 되어있어요. 손으로 글을 쓰면 모든 신문, 잡지, 출판사에서 글을 받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이 이렇게 변했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일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편지를 쓰면 받는 사람 이상으로 쓰는 본인이 굉장한 위안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편지쓰기야 말로 자기 변화의 가장 큰 수단 또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손으로 직접 쓴다는 행위야 말로 가장 쉬운 수공업입니다. 편지 글을 직접 쓰다 보면 사고가 정연해지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도 표출됩니다. 그런 것들이 편지지에 고스란히 녹아 편지를 받는 사람은 쓴 사람을 직접 대면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아무리 멋있게 장문으로 써봐야 프린트 해서 읽어보면 그냥 글일 뿐입니다. 하지만 손수 편지를 쓴 것은 하나의 인격체를 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저는 오로지 편지를 통해서 양 어머니를 얻었습니다. 이건 편지를 통해서 하나의 인격체를 매일 마주치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가족이라는 관념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죠. 그것이 손으로 쓴 편지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컴퓨터 시대이지만 여러분이 양심수 한 명을 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는 습관을 들였으면 합니다. 저는 한 번도 저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편지쓰기를 통해서 작가가 된 사람입니다. 편지쓰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황대권이란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편지쓰기는 상대방에게 나라는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고 또 세상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변화는 자기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죠.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변화되면 세상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6.새삼 편지쓰기의 소중함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데요. 올 연말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는 못해도 작은 카드 하나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지쓰기를 통해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변화되고 이를 통해 세상이 변화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앰네스티를 위해, 이 시대를 위해 해주실 말씀 부탁 드립니다.

네, 저는 지금까지 비주류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교 1~2학년 때, 함석헌 옹이 강연을 듣고 ‘아, 이렇게 살아야 겠다!’ 하고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평생 야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글 중에도 ‘들사람 얼’도 있습니다. 야인을 우리말로 쓰면 들사람이기 때문이죠. 제 학력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긴 했지만, 농과대학을 다니면서 늘 비주류의 삶을 살았어요. 같은 서울대 학생들을 경멸하면서 스스로 엘리트 집단인 것을 부정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규범들을 무시하고 또 기성집단들이 강제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저항하고… 그러다 보니 감옥에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해외에도 정말 많이 나갔는데요. 제가 젊은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기성의 권위에 주눅들지 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라! 돌아이가 돼라!’ 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그 나라에 얼마나 많은 돌아이가 많은가에 달려있습니다. 국화빵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은 형편 없는 것입니다. 제가 생태운동을 하고 생태학 공부를 하는데, 생태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그 생태계 안에 다양한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생태적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국화빵이 많다는 것은 종 다양성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이죠. 종 다양성이 없으면 어떤 충격에 한 방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람들, 온갖 다양한 성격과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면 어떠한 충격이 왔을 때 그 충격에 일부만 무너질 뿐이지 사회는 꿋꿋하게 나아갑니다. 독재시절 거치면서 그러한 돌아이들이 발을 못 붙이게끔 얼마나 탄압했습니까? 머리 길다고 잡혀가고… 그런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꿋꿋하게 돌아이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도 산 속에서 돌아이 짓을 하고 있지만… 저는 여러분이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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