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과 싸우는 피해자들
지난해 가을 법무부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그 후 1년을 돌아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날 추적단불꽃과 리셋(ReSET)은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TF 전문 위원’으로서, ‘텔레그램 성착취 실태’를 법무부 관계자들 앞에서 1시간가량 발표했다. 발표에서는 텔레그램에서 여전히 활개 치는 가해자들에 관해 다뤘다. 발표가 끝난 후, 세미나 참가자들과 짧은 소회를 나눈 자리에서 한 법무부 관계자가 우리에게 피해자들의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낸다’라고도, ‘잘 지내지 못한다’라고도 답할 수 없었다. 추적단불꽃에게 “덕분에 잘 지낸다”라고 연락한 적 있던 피해자분이 현재도 ‘잘 지낼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게, 비정기적으로 자주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우리와 만난 피해자들은 ‘온전히’ 괜찮지도, 내내 고통에 빠져있지도 않은 그런 상태다. 그렇기에 그날 발표에서 우리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하기보다 그들의 일상 회복을 가로막는 가해 사실들을 채증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그 법무부 관계자는 마지막으로 이해 불가한 말을 남겼다. “피해자가 얼마나 힘든 건지, 죽을 정도로 힘든 거면 그런 걸 심층 취재해서 전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2020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법과 제도가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주기적으로 입고 있는 한 분이 ‘이번에는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된 후에 유포된 거라서, 지원을 받기 용이했다’고 말했다.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텔레그램은 못 잡는다’라고 말하던 수사기관이 줄어들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이나 단체의 정부 지원 예산이 확충되기도 했다. 또 ‘온라인 그루밍’이나 ‘가스라이팅’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가 올라가고 ‘불법 촬영’은 중대한 처벌이 따르는 성범죄라는 인식이 퍼졌다.
‘n번방’ 사건 이전의 세상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과 책임을 더욱 혹독하게 물었다. 예컨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한 ‘태도’, 울지 않거나, 고개 숙이지 않을 때 사회는 피해자를 비난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2020년 3월 이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날 선 시선이 조금은 무뎌졌다. 세상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2020년 어느 날, 한 피해자분이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며 소식을 전해준 적이 있다. 한동안 ‘n번방’ 추적기를 증언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를 알렸다. 그럼 기자, 작가, 피디 등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피해자가 잘 지내고 있음에 감동했고, 본인 일처럼 기뻐했다. 당황스러운 인터뷰도 많이 경험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피해를 본 피해 당사자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설명해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하는 기자, 작가, 피디들이 있었다. 그들이 궁금한 게 ‘피해자’인지 그들의 ‘고통’인지 헷갈렸다. ‘피해 당시의 고통’이나 ‘실시간 일상 공유’ 정도로 피해자의 현재 상황을 단정 짓는 느낌에 피해자를 묻는 인터뷰 질문이 어느 순간부터는 불편했다. 자세한 맥락이나 문제를 배제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나열하는 일이, ‘피해자다움’을 강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피해물이 온라인에 한 번 유포되면 완벽한 삭제가 힘든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자의 고통은 영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 때문에 힘든 피해자가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그의 일상이 ‘끝나지 않을 고통’으로 뒤덮여있는 것만은 아니다. 피해 이후, 그가 피해 회복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부족함이 피부에 와닿는다. 아랫글은 정희진 선생님이 지적한 한국 사회 반(反)성폭력 여성운동의 모순이다.
‘“현재 반(反)성폭력 여성운동은 (기존의 언어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 있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과 여성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하고,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인데 동시에 그것은 성적인 폭력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성폭력의 극심한 피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피해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이런 모순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자다움’이란 요구로 재단하려 드는가에서 발생한다. 앞서 말한 일화 속 법무부 관계자처럼 “피해자가 얼마나 힘든 건지, 죽을 정도로 힘든 거면 그런 걸 심층 취재해서 전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며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이들은 반성해야 한다. ‘n번방’ 사건 이전에도 디지털 성범죄의 끔찍함을 호소한 피해자는 존재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은 수년간 본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애써 말해왔으나, ‘밝게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피해자답지 않다고 외면당했다.
추적을 하다 보면 해외 유명 포털사이트에 여전히 노출되는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를 마주하게 된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라는 ‘고객’을 위한 변호사 및 대형 로펌들은 2차 피해를 유발하면서까지 온라인에 본인들의 법률 상품을 홍보하고 있다. 지난 1월 18일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가해자 변호 법률 상품’ 시장이 첨단화하고 있다’고 한다. ‘포렌식 장비를 갖춘 가해자 변호 전문 로펌이 디지털 증거들을 직접 추출해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특정 심리상담소와 가해자를 연결해 법원에 제출할 범죄심리의견서의 작성을 돕는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피해자다움’과 싸우고 있는 피해자가 외롭게 직면할 가해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널려있다.
추적단불꽃은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을 위한 미친 세상을 끝까지 예의주시하려 한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어떤 방식으로 일상 회복을 하고 있는지, 어려움은 무엇인지 관심을 두는 것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추적단불꽃
참여소감
‘피해자다움’을 부수는 그날까지, 추적단불꽃의 추적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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