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로마족의 강제퇴거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국제앰네스티 로비단!
각 구청을 방문하기 위해 준비했던 일들과, 면담과정의 에피소드들을
로비단이 직접 소개 합니다.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저녁. 난 국제앰네스티에서 ‘나는 로비단이다’ 마지막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오는 와중에도 먼 걸음 한 로비단원들은 구청장님에게 어떤 식으로 우리의 목적을 전달할 지에 대해 고민했다. 국제앰네스티와 세르비아 로마족 상황 소개, 구청장님 서명의 의미 등 각자 담당할 역할을 나눴고, 예상질문을 만들어서 미리 답해보았다. 그리고 그 날, 난 유난히 몇 시간 동안 지인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연락을 평소보다 자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국제적 연대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고위공무원인 구청장을 상대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들떠 있어 이런 연락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야 왜 지인들로부터 안부 연락이 빈번하게 왔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물폭탄을 정면으로 맞았고, 가족들은 수재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넘어 당신에게로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식수를 배급 받아야 하는 수재민이 되자, 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로마족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 부담됐다. 그리고 내가 갑자기 위기 상황에 처하니 로마족을 위해 활동하려는 마음도 그만큼 빠르게 움츠려 드는 걸 느꼈다. 이것이 나 자신의 본성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강해질수록 로마족의 불안한 상황,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마치 내 감정처럼 느껴지는 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도 현재 지쳐있지만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니, 내 안에서는 힘을 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쇄도, 인터넷도 안 되어서 손으로 국제앰네스티 소개 대본을 썼다.>
로비단 활동 준비
인쇄도, 인터넷도 안 되어서 손으로 국제앰네스티 소개 대본을 썼다. 노트 3장 분량의 대본을 완벽히 외웠다. 8월 1일 월요일, 구청장님 면담은 4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로비단과 앰네스티 사무국 직원들은 일찍 서둘러서 오후 1시 반에 홍제역 근처 카페에 모여 수 차례 연습을 진행했다. 내 대본 분량도 과감히 줄였다. 김현기 씨는 세르비아 상황을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박건식 씨는 구청장님 서명의 의미를 서대문구청장님의 최근 시정 상황을 포함하여 흥미롭게 준비해왔다.
<로비단을 준비중인 김현기씨, 박건식씨, 윤민지씨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로비단은 면담 시간 30분 전에 서대문구청에 도착했다. 구청 공무원께서 수해 때문에 집단 민원이 들어와 면담시간이 약간 지연되고 있다고 하셨다. 그 사이 난 조금이라도 더 외우려고 대본을 보다가, 한 비서관께서 구청장실로 안내해드리겠다는 말을 듣고 뒷목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걸어가는데, 청장실 앞에서 민원인으로 보이는 몇 분이 큰 소리로 항의하고 계셨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이렇게 몰아내도 되나요?”라 소리치셨다. 난 내 발표 내용만 생각하느라 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면담은 순식간에 소나기처럼
주변 소리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던 면담은 10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서울시의 25개 구청들이 이번 수해로 모두 비상근무에 들어간 터라 길게 면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30여 시간을 들여 대본을 쓰고 3분여 길이로 발표를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30초 정도 밖에 말씀 드리지 못했다. 구청장님의 “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는 때로는 ‘그 정도면 됐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당황하는 내 표정은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기 씨, 박건식 씨는 말씀을 어찌나 간단하고 조리 있게 하시던지! 각자 준비한 내용을 말씀 드린 후 구청장님께서 베오그라드 시장에게 보낼 서한에 서명을 하셨고, 다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나는 로비단이다’ 첫 활동을 마쳤다.
<앰네스티로비단이 첫성과를 이뤄냈다!>
첫 번째 로비를 마친 로비단
수해복구 상황 때문에 면담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건 모두가 느낀 아쉬움이었다. 박건식 씨는 “다음에는 포인트를 잘 잡아서 짧은 시간에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구청장님의 전공과 경력에 따라 내용을 다르게 준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김현기 씨 또한 “짧은 시간 내에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지를 더 깊게 고민해봐야겠다”고 면담 소감을 밝혔다.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미처 구청장님의 의견을 자세하게 듣지 못했고 질의응답 의 기회도 없었지만, 다음 면담 때에는 이 부분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한다는 것이 로비단의 과제물로 남았다.
준비한 내용을 모두 보여드리지 못한 첫 번째 로비였지만 그래도 큰 문제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기분 좋은 로비였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늘은 밝았고, 오랜만에 천천히 걸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던 오후였다.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도움의 마음을
아직까지도 청장실에 들어갈 때 스쳤던 민원인들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들도 이재민, 나도 이재민, 로마족들도 강제퇴거라는 난리를 겪는 이재민이다.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때로는 서로를 옭아매는 듯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민원인들께서 부디 로비단이 혹은 사회가 자신들을 ‘몰아낸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여러분과 똑같이 아파하고, 그런 자신들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모두 일어설 수 있기를, 로비단의 마음이 따스한 햇살이 되어 모든 곳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