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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깍을 떠났지만 벙깍과 함께 한다 : 섹 소쿤롯의 이야기

벙깍 지역 주민들이 내린 결정이 다른 만큼 그들의 삶도 다른 모습으로 빚어지고 있다. 공권력과의 마찰을 피해, 주거권을 포기하고 750달러를 보상금으로 받은 가족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 역시 벙깍의 주민이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듯 보인다.

인권 단체인 LICADHO CANADA에서 커뮤니티-미디어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Sek Sokunroth ⓒ이주영

섹 소쿤롯(Sek Sokunroth)은 이제 LICADHO CANADA라는 NGO단체에 소속되어 커뮤니티-미디어 모티터링을 담당하고 있다. 그 역시 인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고 미디어를 통해 이를 알리는 것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강제퇴거가 있기 전, 그는 벙깍 지역의 주민이면서 그곳을 찾는 여행객을 상대하는 가이드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충분하진 않지만, 생계에 보탤 수 있는 급여를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원어민과 영어로 불편없이 대화할 수 있게 된 건 가이드 일로 얻은 덤이기도 하다. 섹 소쿤롯은 벙깍 커뮤니티가 집회하는 곳에서 인권단체의 일원으로 그들과 함께 한다. 이 글은 그 보상금을 받고 주거권을 포기한 주민의 목소리를 담았다.

 

현재 벙깍 사태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한가?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없이 집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모든 행위가 폭력적이다. 정부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고려하지 않았다. 그 어떤 대화나 협상 없이 밀어붙이기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1개의 구역, 즉 빌리지 1, 2, 3, 4, 5, 6, 20, 21, 22, 23, 24로 구분된 곳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강제 퇴거를 시작했고, 내가 머물던 빌리지 6도 그 중 하나였다. 이곳 사람들은 강제 퇴거를 전후로, 많은 눈물을 흘리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했으며,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벙깍 사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주거권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고통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제 퇴거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벙깍은 프놈펜 시내 중심에 있었다. 벙깍에서 벗어난 후 현재 당신과 가족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보상금 8,500달러를 현금으로 받았다. 빌리지 6에 있는 우리 집은 절반은 땅 위에, 절반은 호수에 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1995년부터 벙깍에 살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일곱 식구와 함께 생활했다. 어머니는 꽃을 파는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시다. 물론 아버지의 직업적 이유도 이런 선택을 내리는 데 일조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제 집이 철거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아무 것도 없이 거리로 나 앉을 수 있다는 공포로 어머니는 건강이 많이 상하셨고 급기야는 심장병까지 얻으셨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이었고 회사측은 사람을 사서 어느, 어느 집이 곧 철거된다는 식의 루머를 퍼뜨리고, 때로는 감시를 하거나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고 꽃을 파는 것으로 생활하던 어머니께서는 더 많이 불안해하셨다. 군인인 아버지의 월급보다 어머니께서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가족은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리고 벙깍에 살던 때와 비교한다면, 형편없이 지내고 있다. 부모님이 사는 곳은 Kien Svey, 라는 곳인데, 오토바이(캄보디아의 일반적인 교통 수단임)로 25분 정도 달려서 닿을 수 있다.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도로 사정이 나쁘고 접근성이 떨어져서 여동생과 나는 프놈펜에 작은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처음에는 가족이 모두 함께 사는 방향으로 집도 알아 보았지만, 보상금으로는 일곱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의 집을 얻기가 어려웠고 결국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보상금을 받고 자진 퇴거를 결정한 후, 되팔기 위해 목재 등을 모으는 모습 ⓒSek Sokunroth

 

마을 주민들이 각기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우리 가족은 벙깍이 아닌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서 지내고 있다. 보상금을 받고 그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적어도 더 이상 그곳에서 받을 고통, 즉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이상 마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다행이기도 하다, 벙깍 주민들과 끝까지 연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남는다. 정부가 제시한 보상금도 충분한 돈이 아니었고, 주민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생각으로 우리 가족도 처음에는 벙깍 지역에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각 가정이 다른 결정으로 나누어지면서, 결국 주민 사이에 의심과 질투의 감정이 싹텄다. 누구는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보상금으로 인해 질시하기도 했으며 이런 이유로 더 큰 연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유년의 추억이 담긴 집을 떠나기 전의 Sek Sokunroth의 모습 ⓒSek Sokunroth

 

나는 인권단체에 몸담으면서 벙깍 주민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그들의 의견이 밖으로 알려지도록 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버리고, 용기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계를 포기하고 정부와 회사에 대항하는 커뮤니티의 모습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지금 벙깍에 남아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주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인권 분야에서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최소한의 마음의 짐을 덜었기 때문이다.

 

섹 소쿤롯씨는 특히 빌리지 1과 21은 주민들이 미쳐 짐을 꾸리지도 못한 새벽에 강제 퇴거를 당해서 많은 부상자를 나왔다면서, 주민 가운데 임신 중이던 여성 2명은 임신 상태에서 아이를 잃었고, 강제퇴거 문제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경우 2건이나 있다고 증언했다. 또한 강제 퇴거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 이외에도 잠재된 폭력이 곳곳에서 산재해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섹 소쿤롯은 이제는 추억 속의 장소가 되어버린, 그리고 유년 시절의 기억이 새겨진 집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집을 떠나게 되면서, 가족과 나눈 추억도 기억 속에 봉해졌다. 유년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있는 집이었기에, 또한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기에 자진퇴거를 하면서 괴로웠다.”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강제 퇴거민에게 강제퇴거의 과정은 전쟁 상황과 다름이 없다. 합법적인 절차가 배제되고 생명에 대한 존엄도 무시된 채, 누군가, 힘을 가진 쪽이 그들의 목적과 계획,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반대쪽의 개인이나 집단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폭압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군다나 강제퇴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마음으로 속수무책 방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잔 손탁이 언급한 ‘타인의 고통’ 이란 이런 의미에서 슬픈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경제적인 이익과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폭발물이 산재해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것이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전멸이거나 불안의 근원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 이 전쟁에 버금가는 강제퇴거 논리에서 한 발작 떨어져 그 폭력성을 인식하고 사람이 중심이 된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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