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under Pinochet : The day we buried our freedom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연간 300일 이상이 맑은 칠레 산티아고. 그날도 화창했지만 이상하게 라디오에서는 비가 내린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쿠데타를 개시하는 군부의 작전암호였던 것이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 관저를 포위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다 사망했다. 이후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 동안 4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고, 3,000여명이 강제실종 되었거나 살해되었다. 38,000명이 불법구금되었고, 고문 받았다.
201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쿠데타 후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기억과 피노체트 치하의 삶을 잊지 못하고 거리로 나와 군사 쿠데타로 중단된 민주주의와 사라진 헌정질서, 그리고 독재정권 아래 자행된 인권탄압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Sebastián Piñera 칠레 대통령은 쿠데타 희생자 추모 행사에서 “진실과 정의가 없는 국민화합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칠레의 작가이자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인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는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이 그녀의 삶과 그녀의 나라가 이후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인터뷰를 통해 그 소회를 전했다.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리란 것을 언제 알게 되었나요?
사람들이 때로 군사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했었습니다만, 아무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고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칠레는 오랜 세월에 걸쳐 견고해진 민주주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사개입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반(反) 군사정권의 상징이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장례식을 계기로 군사 쿠데타에 대항하는 첫 시위가 일어났었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1973년 9월 23일, 파블로 네루다의 죽음은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되어야 마땅한데도 독재정권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파블로의 장례식에 대한 소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이내 사람들은 그가 묻힌 묘지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네루다의 가장 혁명적인 시를 낭송하고, 구호를 외치고, 며칠 전 국립경기장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된 빅토르 하라Victor Jara 노래 등 민중가요를 불렀습니다. 몇 발의 총성으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네루다의 관이 머물러 있는 묘지까지 서너 블록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단 몇 명뿐이어서 군인들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을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행렬에 동참했고, 우리는 우리가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네루다의 이름을 외쳤고, 이내 아옌데와 하라의 이름도 외쳤습니다.
점점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웠습니다. 저는 군인들이 손가락을 방아쇠에 놓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네루다뿐만 아니라 아옌데, 하라, 그리고 피해자 수백 명을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도 또한 묻었습니다.
쿠데타 이후 산티아고의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독재정권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아옌데의 죽음에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피노체트를 지지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깨닫고, 독재정권에 의문을 던지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습니다.
1973년과 1973년의 제가 알던 모든 학생, 언론인, 지식인, 예술인, 노동자 사이의 분위기는 굉장히 침울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를 원했고, 저자세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살고자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고문실, 강제수용소, 암살, 급습에 대해서 얘기하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든지,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도망쳤다거나 전화가 도청된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칠레를 찾은 여행객에게 이 공포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여행객은 깨끗한 도시에 친절하고 온순한 사람들과, 도시범죄라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정돈된 나라를 보았을 것입니다. 여행객들은 어디서건 경찰과 무장한 군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통금 때문에 조금은 지루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칠레를 즐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곳에서 공포 속에 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군사정권 아래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삼촌이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나요
저는 언론인이었으며 페미니스트이자 좌파였고, 제 이름이 저를 더 돋보이게 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제 삼촌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저를 계속 감시했습니다. 제가 하고 있던 모든 일자리에서 해고당했지만, 1975년 초까지만 해도 제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비밀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부에서 일하는 친척이 제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으며, 언제고 잡혀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또 제가 은신처를 제공한 사람이 체포되었고, 그가 저에 대해서 말한다면 끝장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홀로 베네수엘라로 갔습니다.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칠레로 돌아가면 위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Caracas에서 13년을 살았습니다.
칠레에서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이 무서운 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제 친구들도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재정권의 억압과 부패를 눈감으며 모르는 척했습니다.
독재정권의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고립되어 갔습니다.
고립된 핵가족들이 각자 집에서 공영방송 TV에서 틀어주는 뉴스를 보게 되지요. 거기엔 어떠한 상호작용도, 대중간의 담론도, 대화도, 토론도, 의견교환도 없습니다.
어떻게 피노체트가 17년간 통치할 수 있었습니까?
공포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고 피노체트는 이를 성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피노체트는 군대와 사법부를 장악했고, 의회를 폐쇄했습니다. 출판의 자유, 인신보호, 비판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피노체트가 도입한 경제시스템은 철권통치 아래 강제노동으로 자본가들만 이득을 보았고, 결국 칠레에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격차는 심각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노체트에 대한 지지는 하락했고, 마침내 선거를 통해 피노체트를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천 명이 피노체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 상처들이 아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모든 상처는 적절한 때에 아물기 마련입니다. 쿠데타 이후 40년이 흘렀습니다. 피노체트는 아이들이 잠자리에서나 들을 법한 무서운 이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