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20일에 있었던 <영화로 보는 인권 MY BODY MT RIGHTS>에 참석해 주신 문지숙 회원님의 글입니다.
대학 시절 존경하던 교수님은 ‘벌은 밀랍으로, 인간은 말과 생각으로 집을 짓는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리고는 당신 두 손을 마주 잡고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스스로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라 몸소 보여주셨다. ‘희망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 권력의 민간인사찰, 보이스피싱, CCTV, SNS 속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을 자체 검열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만은 분명하다. 새삼 나는 희망의 언어를 다시 고민한다. 말과 생각으로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한 소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1987년 할렘, 잡지 커버모델을 꿈꾸는 열여섯 흑인 소녀 프레셔스(클레리스 프레셔스 존스)는 두 번째 임신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 교실 구석에서 존재감 없는 외톨이 학교생활을 하던 터였다. 문제는 프레셔스가 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정부보조금을 받고 있어, 당장의 생활고에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엄마의 화가 단단히 났다. 하지만 엄마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딸을 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못생긴 흑인 뚱땡이
프레셔스가 아빠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다운증후군인 첫째 딸 몽고가 부엌에서 태어나던 날 엄마는 그녀에게 발길질을 했다. 엄마의 인생에서 딸은 비정한 아빠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불쌍한 아이가 아닌, 내 남자를 빼앗은 못된 년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재 자체로 화가 나는 딸과 남편을 닮은 손녀 덕분에 정부보조금을 받지만, 화를 자초한 짐승만도 못한 딸을 함부로 부리는 것 역시 마땅하다 여긴다. 아직 자립할 수 없는 프레셔스는 TV앞 소파에 앉아 먹고 자는 엄마를 수발하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순간을 꿈꾼다. 환상 속에서 그녀는 도도하게 레드카펫을 걷는 배우로, 환한 조명 아래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 되며, 곁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친구가 있다.
일상적인 폭력으로부터 도망칠 비상구가 되어준 곳은 교장이 추천해 준 대안학교 ‘이치원 티치원(EACH ONE TEACH ONE)’이다. 프레셔스는 친절한 블루 레인 선생님을 만나 읽고 쓰는 방법부터 차근히 배우며 희망을 꿈꾼다.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기초반 교실에는 레즈비언 여교사와 불법 이주민, 흑인, 마약중독자, 미혼모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사랑 받은 적 없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더는 외톨이로 남겨 두지 않는다.
그러나 프레셔스의 삶은 세상의 모든 불행을 한 번에 받기로 결심한 듯, 설상가상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는다. 고작 열여섯 소녀의 비극적인 삶 안에는 인종차별과 가난, 교육 시스템, 가족 내 폭력, 에이즈 등 1987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날의 맨 얼굴을 보게 하는 불편함이 있다.
결국 모든 갈등은 평등과 자유를 향한다
여기 또 다른 소녀가 있다. 프레셔스와 같은 나이의 말라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는 파키스탄 여학생의 교육 받을 권리를 위해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국제앰네스티 양심대사상 수상자에 선정되었다. 말라라는 평등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총상을 입기도 했다. 나는 묻는다. 이러한 말라라의 희생과 용기는 에이즈에 걸린 아버지의 자식을 낳은 프레셔스의 삶보다 더 숭고한가? 그저 두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키우고 싶은 프레셔스의 꿈은 학교에 갈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어린이의 꿈보다 덜 중요한가?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친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는 열여섯 짧은 삶의 경험에서 얻은 아픈 교훈이 있다. 하나, 프레셔스는 두 아이가 자신과 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삶의 모든 것을 가르치기로 다짐한다. 그녀가 인생의 첫 선생으로서 오염된 상식을 가진 부모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둘째는 엄마와 같은 인생을 거부했다.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비난의 단어로 세운 자존감과 세상은 그녀를 두려움에 머무르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처럼 분노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글쓰기를 통해 모든 문제를 구체화하여 ‘왜 하필 나(Why me)?’인지 물으며 저항했다.
문제를 직면하는 일은 나의 가장 여린 속살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이다.
친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민이 말과 글로 나에게 전달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된다. 앰네스티가 지난 역사를 통해 보여준 기적 역시 그렇지 않을까. 국가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피해자의 고통에 참여하고 지지를 보낼 때, 전세계에서 보낸 단순한 엽서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우린 목격했다. 당신의 상황에 눈물이 나고 화가 난다는 말, 지치지 말고 힘내라는 응원, 함께 싸워주겠다는 약속은 분명 말과 글로 전해지는 희망의 언어였다.
감히 가늠하기도 어려운 앞날을, 프레셔스는 두 아이와 함께 힘차게 걷는다. 환상 속 레드카펫을 걷던 당당함과 행복한 미소로 서툰 투쟁을 시작한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프레셔스와 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을 프레셔스를 벅차게 응원한다.